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남대희 시집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7)

김창집 2023. 7. 24. 01:30

 

 

읍내

 

 

교회 첨탑 십자가 위

비둘기 날아가고

하늘이 살짝 흔들렸다

 

유리창은 노을로 물들고

도시는 화장을 고치고

첨탑 너머 목욕탕 간판이

덩달아 번쩍이고

 

노인 몇 태운 마을버스

꽁무니 탈탈 흔들며 지나가고

 

포플러 잘린 가지도

새잎을 내밀고, 그것을

노을이 가만히 만지고 갔다

 

 

 

 

미호천

 

 

백로가

백 년 동안

이 강을 찾는 까닭이 있었다

묘천이 미호천이 될 때까지

발목을 잘라 가는 강물 위에서

외다리로 서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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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천이라는 이름이 미호천으로 변하였다는 전언이 있다. 청주와 오창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

 

 

 

 

둥구나무

 

 

무수한 혀가 있다는 것

그 혀만큼 세상을 맛볼 수 있다는 것

 

휘파람 불고 노래하고

집을 짓고 연애도 하고

 

숭숭한 몸집 세월만큼 부풀었지만

어둠이 골목을 숨길 때까지

떠나간 새들은 돌아오질 않았고

 

구름이 걸터앉고 무지개가 놀다 가는 날엔

서산에 환하게 걸리는 눈빛과

가지마다 열리는 붉은 노을

 

 

 

 

자작나무숲 속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하늘

백만 기병의 깃발

 

거병의 순간

가부키 몸짓 같은 축제

 

동여맨 은빛 붕대 사이

툭툭 터져 나오는 환호성

 

주술 같은

긴 바람 소리 가득 품은

 

자작나무 숲에 첫눈이 내린다

 

 

 

 

호수와 소나무

 

 

호수가 보이는 언덕

늙은 소나무

상처가 마를 날이 없는데

폐병 앓던 순애가

나뭇가지가 되던 날

짙은 송진 냄새를 남겼다

 

시간은 진득거리며 가고

진득한 송진도 반짝이는 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배롱나무 붉게 물들 때쯤

내 그림자도 호수와 함께 물들어 갔다

 

바람이 식고 하늘 높던 시절

서쪽 하늘같이 가라앉았지만

 

통점으로 남은 그 물가

갈대 스치는 소리 아련하다

 

 

          *남대희 시집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우리,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