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2)

김창집 2023. 7. 23. 00:27

 

행방 - 김병택

 

 

겨울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세상 여기저기 떠돌던 탁한 소리들이

초가집 등불 앞에 기립한 채로 모여들었다

 

심심할 땐, 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일부러 가사를 바꾼 렛잇비

낡은 집 뒤뜰에서 여러 번 불렀다

억지로 들판을 건너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매일 바라보는 산은 어느 날, 어느 시간에도

성직자처럼 낮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무에 앉은 매미들이 합창소리와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빛이

함께 바다 속으로 우르르 물러가곤 했다

 

메마른 산등성이를 달리던 노루가

웬걸, 아득한 공중을 향해 뛰어올랐다

 

요즈음과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의 이념

금속성의 연설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이제, 한 톨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밥심 김순선

 

 

오랜 세월 견디어 온

고목 같은 식당 이름

 

식당 귀퉁이 처마 밑에

비루먹은 나무 한 그루

천덕꾸러기처럼

모질게 자라나

어느 날 불끈

밥심으로

식당 지붕을 뚫고

하늘 향해 두 팔 벌렸다

 

쇠락해 가는 지붕 위에서

공중에 묘판을 만들고

불끈불끈

밥심으로

봄을 피워 올린다

 

 

 

 

별을 헤아리다 - 김승립

 

 

서로의 눈에서 별을 줍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 별을 하늘에 걸어 약속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기억이 떠오르긴 하나요

 

그 별들 어디로 흘러갔을까요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이제 눈 내리고

지상에 새겨진 별의 발자국을 헤아리는 시간이 되었네요

 

하염없이 가만한 슬픔에 기대어 사는 것도 또 다른 약속이겠지요

 

 

 

 

풍문 김원욱

 

 

   풍문은 늘 그랬다 그녀가 떠나고 절룩이며 걸어가는 집의 저편 웅숭깊은 할머니 우뚝 서서 얼씨구절씨구 장단을 맞추는 동안 수런거리는 이승의 그림자, 언제부터인가 내 안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외진 시궁창에서 파닥이다가 때론 그슨새*로 까마득한 시공을 건너오다가 밤새 사악한 피로 얼룩진 문밖 내쳐진 육신이 세파에 갇혀서 오지도 가지도 못한다는 소식 바람결에 듣던 날 불타오르는 하늘길 따라 성큼성큼 천계의 허한 내장 밑바닥까지 휩쓸고 간 제주들판 낮은 풀잎 도란도란 모여 사는 할머니 나라 그 잠은 깊은가요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을 향해 울부짖는 거룩한 비명만 남아서 몰락하는 잠의 이쪽 서늘한 어둠 건너오신 할머니 그늘에 묻힌 토산마을 갯가 구시렁거리는 소리, 금성산 구렁이 한 마리 똬리를 틀고 나앉아 못 잊을 누군가의 살과 뼈를 조각조각 모자이크하면서 제발 무사하기를, 성간을 건너며 휘청이는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를, 숭숭 뚫린 돌담 사이 불의 나라 제단을 떠도는 탕아처럼 일렁이는 풍문에 갇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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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슨새는 어둠을 실체로 한 요괴로, 컴컴한 밤 한없이 큰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귀신.

 

 

 

 

천남성 - 김순남

 

 

처음부터 독을 품지는 않았다

한 때는 시리고 주린 이의

황급한 끼니였으니까

 

편견과 편협한 아집들이 할퀸 자리에

굳은살 철옹성에 갇혀버린

온순한 것들이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속으로 밀려 내려간 설움이

백두옹이 되고도 기어이 별빛을 따라

동가식서가숙 목 놓아 생을 부르며

한 해는 암꽃으로 또

한 해는 수꽃이 되어 봐도

괴롭지 않은 삶은 없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계절의 끝자락 저쯤에서

새빨간 열매로 반들거릴 때

더는 부러운 게 없지 싶었다

 

세상에 독초는 없다

어떤 풀도 순하지 않은 것은 없다

고락을 피하면 덤불이 나온다

 

눈길 닿는 그곳에

빛나는 마음 하나 거기 있다

 

 

                  *계간 제주작가2023년 여름호(통권 8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