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에서(2)

김창집 2023. 7. 25. 00:20

 

 

아침에 내리는 비

 

 

어젯밤 꿈속에서 들었던

빗방울 전주곡의 여음이

천지사방에 비가 되어 내린다

아직도 조금 남은 이 아침에

 

비의 무게에 눌린 바람이

지붕 위에서 잠시 멈추자

나뭇잎들이 잠시 웅성거리고

날아가는 새들도 놀라 몸을 턴다

 

어떤 풍경은 매우 익숙하지만

다른 어떤 풍경은 참으로 낯설다

 

그토록 햇빛 강렬했던 어제가

더욱더 선명한 모습으로 떠오른다

 

다시 바람 거세게 불고

 

뒤뜰 대나무밭에서는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의 기호들이

놀잇감을 찾듯 여기저기를

어제 아침처럼 뛰어다닌다

 

 

 

 

후박나무의 바람

 

 

두껍게, 아주 반질반질하게

윤기 흐르는 넓은 잎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바람은

늘 감출 수 없는 초록색이다

 

볼품없이 마른 작은 가지들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흔들릴 때

쓸데없이 탁한 소리를 지를 때

 

그곳으로 자리를 옮긴 큰 가지는

바람의 채찍을 서너 번 휘두르며

자잘한 소란들을 평정시킨다

지금까지 늘 그렇게 해왔듯이

 

검자주색 구슬 열매 달린

후박나무는 이십 년의 경험으로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오래 전부터 수목원에서 시작한

바람이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붉은 생채기를 치유하고 있음을

 

 

 

 

우리의 단풍놀이

 

 

이곳저곳으로 구르는 산새 소리가

숲속의 정적을 깨트리고 있었다

 

산 중턱에 머물고 있던 가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결정한 듯

우리의 손을 잡아끌고

단풍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몇몇 젊은이가 산을 오르다가

단풍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우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한쪽에서는 초록색의 다른 가을들이

병풍처럼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우리를 호위하고 있는 게 보였다

 

 

 

 

독경 소리

 

 

안개 걷힌 산사山寺 주위에

여리디여린 곡선으로 퍼졌다

서늘하기까지 한 소리에는

철쭉꽃들도 가만히 숨을 죽였다

 

아침마다 비껴가는 언덕에

아파트가 서너 채 들어섰다

소리가, 부딪치며 싸운 뒤 남은

사람들의 흔적을 거두어 갔다

 

쉬지 않고 날아다니는 새들과

자주 도약하는 곤충들의 몸짓은

들판 어디에도 있을 테지만

소리와 섞이면 특히 잘 보였다

 

가슴속에 천천히 심어놓았다

언덕을 돌며, 서성거리며

 

 

 

 

날마다 침묵한다

 

 

물결 소리에서 파도 소리까지

치닫는 선율의 주법으로

 

처음엔 가물거리다가

나중엔 커지는 점선의 화법으로

 

번번이 익숙하기는커녕 늘

낯설고 놀라운 수사의 기법으로

 

빈터에서 날마다 침묵한다

오로지 시 한 편 세우기 위해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황금알,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