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4)에서

김창집 2023. 8. 4. 00:04

 

오일장

 

 

여기저기를 돌다 들어선 고향에서처럼

우아한 언어들은 결코 만날 수 없다

백화를 좇는 말들이 무성할 뿐

바다가 출렁이고, 따뜻한 봄날에는

굳었던 좌판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바위 같은 침묵으로 휩싸인 바닥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흔들린다

쨍그랑 쨍그랑

여기서는 엿을 파는 할아버지의

가위소리 울림이 하도 길어서

옛날 들었던 기억을 붙잡고 있으면

십 년 만에 친구를 만나는 우연도

전혀 불가능하지 않게 일어난다

각설이 타령 또한 끊이지 않고

쉼 없이 펄럭이는 포장 속에는

시장의 생존방식이 꿈틀거린다

젊은 남자가 쉴 새 없이

귤 상자를 차에서 내려놓는다

 

석양은 오늘도 붉게 타고 있고

 

 

 

깨어나는 집

 

 

낮에는 햇살이 자주 흩뿌려졌고

새들이 날개 스치는 소리도 들렸다

 

밤이 되면 창호지를 바른 초가집

조그만 방의 호롱불 주위 그림자가

조금씩 흔들리는 게 보였다

책장을 넘기는 아버지의 손이었다

 

성현의 메마른 말씀이 문틈으로

새어 나올 때면, 엄격한 글자들이

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바깥채에서 밤을 보냈다

거기에는, 창호지문도

책장 넘기는 아버지도

성현의 말씀도 없었지만

대신 비밀을 담은 상자와

한번 빗장을 걸면 끝까지

열리지 않는 대문이 있었다

 

여명에 잠겨 있던 바다가 출렁였다

사람들이 바다로 몰려들었고

마을의 모든 집들이 잠에서 깨어났다

안채도, 바깥채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찮은 기억의 항아리

 

 

태풍에 실려 온 돌멩이에 맞아

오래되고 잘 생긴 항아리가 깨졌다

많은 분량의 곡식과 함께

아련한 추억으로 가득한 유년이

장독대 주위에 와르르 쏟아졌다

 

깨진 항아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래가 좁고 배부른 새 항아리를

하나 구입하고는, 항아리 속에다

길에 뒹구는 대여섯 개의 유년을 담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돌멩이에 깨진 항아리 속의 유년을

떠올리게 하는 아침에는 짐짓

마을의 골목길을 서성대며

혼자 긴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서 희망한 적도 있었다

 

누구든 흐린 날 새벽에 찾아와

이제는 내 하찮은 기억의 항아리,

잘게 깨부수어 주기를

 

 

 

 

삼신인의 목소리

     -제주박물관에서

 

 

화북포구에서 달려온 바람이

넓은 마당 곳곳에 정지해 있는

먼 옛날의 시간들을 빠르게 휘젓는다

 

삼신인三神人의 목소리는

말발굽 소리들이 서로 싸움하듯

한참 동안 난장을 벌인 뒤에야

열린 내 귀에 다가왔다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하늘과 바다가 요동치던 그 모습으로

면면한 생의 줄기를 잇게 한 것은

속절없이 지켜야 할 도덕도

꽃 주위에 모인 팽팽한 향기도

낭랑하게 퍼지는 말[言語]의 경쟁도

질서를 세우는 규율도 아니었다

 

저쪽 수평선에 자리 잡은 정신이었다

삼신인의 목소리는 박물관 밖에서도

사람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입소기

    -로빈슨 크루스에 빗대어

 

 

정박 중인, 커다란 배로 다가갈

튼튼하고 변변한 뗏목 하나도

햇빛 가릴 나무 한 그루도 없었다

 

젊은 가슴 속에는 느닷없는

공격에 대비할 칼 같은 마음만

단단히 숨기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곳을 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하루에 출입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희미한 발자국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아무도 몰래 들어와

염탐을 끝낸 흔적임이 확실했다

 

무인도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므로

대강 헤아려도 어마어마한 분량의

불안이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가급적 양식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매일 연구를 계속할 요량이었지만

 

앞으로 자주 만나야 할 소장所長

독재 권력자와 유사하다는 소문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이 나직하게 말했다

잘못된 시대에는 흔했던 일이라고

 

그나저나 하늘 아래 약자인 우리에겐

입소 기간을 무사히 보내는 것이

마음속에 품은 유일한 희망일 터였다

 

 

                       *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황금알,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