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남대희 시집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완)

김창집 2023. 8. 3. 00:14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양철 지붕에 햇살이 튕기고

마른 발바닥으로 햇살을 밟고 있는

 

회색 털 사이로 파고든 햇빛이

꼬리를 잘라가고 눈알을 빼 가는 줄도 모르고

바람 따라 귀만 쫑긋거리고 있는

 

섣달그믐 몰려든 어둠은

산자락을 베물고 그림자를 조금씩 키우고 있는

 

애완으로 변해버린

야생의 본능을 바람이 쿡쿡 찔러보고 있는

 

한 호모사피엔스가 햇살을 밟고 서 있는

한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는 오후다

 

---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소설

 

 

 

 

지우개 똥

 

 

이별이라고 쓰고

지우개로 문지르면 지우개도 아픈지

하얀 몸 까맣게 태우며

이별을 돌돌 감고 쓰러지네

 

책상 위 지우개 똥

거룩한 성자의 이름도

화려한 스타의 이름도

억만장자의 이름도 돌돌 말아 흩어져 있네

 

몸 문질러 지워낸 자리

하얗게 비워지네

 

내가 누군가의 허물을 돌돌 말아

지워내고 남은 지우개 똥이라도 좋겠네

 

 

 

명예퇴직

 

 

농로를 지나고 농가를 지나고

탱자나무 울타리 밭둑길도 지나고

찔레꽃 둔덕을 지나

철쭉꽃 골짜기를 건너

억새풀 들판을 지나고

바윗길도 지나

가파른 절벽을 돌아 산마루

 

허허로운 허공

 

지나온 것들 햇살에 반짝이고 있을 뿐

 

 

 

 

아내가 토마토를 사왔다

 

 

아내가 사온 토마토

발그레 통통 시집온 날 그녀 같다

 

두 개의 방엔 씨앗들 졸망졸망

부드러운 과즙 가득해

 

그녀를 처음 안았을 때 파도소리를 내며 넘실거렸고

나는 붉은 햇살보다 뜨거웠다

 

아내는 시집올 때 이미 크고 싱싱한 토마토 한 알

곱게 품고 왔다

 

 

 

 

그때는

 

 

하늘이 붉게 물들면

골목마다 아이들 부르는 소리 요란했지

라디오 소리 아궁이로 들어가

타닥타닥 여물 익히는 시간이었어

 

쟁기질 끝으로 돌아오신 아버지

누렁이 목덜미 쓰다듬어 주시면

워낭 소리 어둠 속으로 나풀나풀 날아가고

 

탱자나무 밑으로 콩새들 파고들면

달구가래*에 병아리 불러 모으고

저녁밥 누룽지 눋는 냄새 굴뚝으로 하얗게 빠져나오는 시간

어머니 머릿수건으로 그을음 탁탁 털고 나오시면

 

동아 전과 요점 정리같이

일목요연해진 하루

 

---

*달구가래 : 어리의 방언.

 

 

           *남대희 시집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우리,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