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moon'에서(1)

김창집 2023. 8. 2. 01:00

 

 

시인의 말

 

 

  무화과, 꽃이 나에게 말을 한다

 

  사람들은 꽃이 없는 줄 알지만, 꽃이 너무 많아서 숨겨 두었지, 꽃이 너무 붉어서 숨겨두었지 너에게만 남모르게 보여주려고, 깊이깊이 더 깊숙이 숨겨 두었지, 너에게만 살짝이 길을 알려 줄게, 너에게만 온전히 꽃을 보여줄게, 오직 너에게만 나의 사랑을 줄게

 

  무화과, 열매가 너에게 말을 한다

 

  너에게만 보여주려고 숨겨둔 꽃, 너에게만 열어주려고 닫아둔 문, 너에게만 달려가고픈 사랑의 말, 너에게만 안기고 싶은 나의 가슴,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아무리 기다려도 너는 보이지 않고, 새들이 쪼아대고 뱀이 똬리를 틀어, 홀로 익어버린 사랑 터질 것만 같아

 

 

                                                                2023년 봄여름

                                              이어도 공화국에서 배진성

 

 

 

 

세한도

 

 

심장내과 복도에는 어둠이 쌓여 있다

나의 하느님이신 원장님께서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잠시 후에 천사들이 들어오며 출근 체크를 한다

피를 뽑아 검사하는 동안 나는 세한도를 본다

늙은 한 그루는 소나무가 분명한데

젊은 세 그루는 소나무일까 잣나무일까

나무들보다 둥그런 문이 더 궁금하다

보름달 안에서 반달이 보인다

초승달과 그믐달도 보인다

그 문에서 나의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동맥판막 반월문에서 시계소리가 들린다

반월산에 나란히 누워계신 반달 두 개도 보인다

엎어놓은 반달의 잔디 위에도 눈이 쌓여 있으리라

아직은 나의 반달문이 잘 열리고 잘 닫히고 있으리라

금속으로 만든 반월 문짝이 빠지는 일도 있으리라

문짝이 칼이 되어 대동맥을 갈라버릴 수도 있으리라

문을 지나가는 피가 떡이 되어 핏줄을 막아버릴 수도 있으리라

혈전이 뇌로 가서 뇌졸중을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

비트코인처럼 빛나던 문이 악귀의 입처럼 변할 수도 있으리라

, 나는 이제 심장에서 나가는 문이 가장 무섭다

, 나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달이 가장 무섭다

나는 나의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아들고 나온다

세한도 밖으로 폭설은 멈출 줄 모르는데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아직은 잘 살아가고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나의 묽은 피로 붉은 낙관을 찍는다

 

 

 

 

 

 

봄이 오고 있다

봄을 본다

 

봄이 몸으로 보인다

봄이 몹으로 보인다

봄이 봅으로 보인다

 

해가 조금씩 일찍 온다

해가 조금씩 늦게 간다

 

해를 보려고 새싹이 돋아난다

해를 보려고 풀들이 자라난다

 

봄은 봄()이다

봄은 청춘이다

 

봄은 스프링(spring)이다

봄은 통통 튀어 오른다

 

봄은 봄(bomb)이다

봄은 펑펑 터진다

 

봄이 왔다

봄이 봄으로 보인다

 

나도 이제 봄이다

봄이 환하게 핀다

 

 

 

 

굼벵이의 꿈

 

 

이른 봄 배추밭을 파니

지렁이와 함께

굼벵이들이 많다

푸른 젊음을 벗고 노랗게 익은 배추벌레들이 많다

아직 날개는 보이지 않는다

나비가 되어 날고 있는 꿈을 꾸고 있을 굼벵이들이

강아지 배 속으로 들어간다

땅을 파고 나올 세 쌍의 앞발을 사용해보지 못하고

굼벵이들은 강아지 몸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나비보다 더 오래 기다려온 매미의 꿈이 먼저 흙 속에서 기어서 올라온다

 

 

 

 

등이 환하다

 

 

오랜만에 빈 고향집에 돌아왔다

빈터에 꽃을 심다가 허리를 폈다

깨벅쟁이 친구 어머니가

감나무 아래 샘터에서 목욕을 하고 계신다

어머니와 친구는 오래전 흙이 되어

등목을 할 수 없다

나의 등과 친구 어머니 등에 손이 닿지 않는다

가만히 다시 내려다보니

내가 심은 꽃들이 등을 내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뼈만 남은 저 감나무 말벗이라도 되어야겠다

 

 

 

       *배진성 시집 [이어도공화국6] 서천꽃밭 달문 moon(시산맥사,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