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백 – 정수자
백석 편에 숨겨 놓은 애인의 심화처럼
저음의 행간마다 눈썹 시린 여진은
때 없이 애가 마르는 통영 어느 물살 같아
돌아올 길 아예 잃은 무지외반 탁발처럼
먼물에도 자분자분 귀밑 세는 여진은
바람의 여음을 짚다 혀를 데인 풍경風磬 같아
♧ 시래기의 힘 - 우은숙
행여, 기죽지 마라
환절기 몸살이다
맨 처음 네 입술이
세상 향해 삐죽일 때
성급히
너를 잊고자 흰눈을 기다렸다
그 겨울 오고
곤궁해진 오후 2시
행여 기죽지 마라
나는 새로 태어난다
뜨겁게
몸 던진 순간 함박눈이 내린다
대붕의 날개짓으로
세계를 받치던 힘
이제는 실직 앞에
허공 품는 시래기지만
절대로
기죽지 마라
당신은 아․버․지․다
♧ 소금쟁이 - 이애자
몰입이 무섭네요
각 잡힌 스텝 보세요
달리 쟁이겠습니까만
조력자가 있네요
그대의 그림자가 늘
물밑을 괴고 있네요
♧ 이상기후 - 이송희
액정 나간 핸드폰을 수리점에 맡긴 날
당신의 번호가 떠오르지 않아서
막연한 숫자 누르다
낯선 이름 불렀지
빈 화분 머물다 간 빛바랜 바람 소리
먼지 낀 창문들이 기억을 들춰내면
길 건너 풍경 하나가
지워지는 중이야
뼈마디 맞추느라 우린 오래 흔들렸지
죽은 듯 잠든 시계
오늘은 며칠인가
냄비엔 펄펄 끓다가
식어버린 혼잣말
♧ 줌인(Zoom In) - 한분옥
지친 잠의 머리맡에 너를 맡겨놓고
어느 자오선을 밀 거냐 당길 거냐
먼 날의 신접살림에
나 하나의 달로 떠서
너와 나 사이에 하 세월의 강은 흘러
날숨이 긴 날이면 종일토록 맴을 돌다
푹 삭은 애간장 두고 생손톱을 깎느니
창밖 북두성이 귀엣말을 건네더니
가까이 당길수록 네 목소리 들리는 듯
짧아서 봄밤이더냐
나 네 곁의 달로 떠서
*정드리문학 제11집 『박수기정 관점』 (문학과 사람,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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