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드리 창에 비친 '좋은 시조 10선'(1)

김창집 2023. 8. 5. 11:06

 

 

여백 정수자

 

 

백석 편에 숨겨 놓은 애인의 심화처럼

 

저음의 행간마다 눈썹 시린 여진은

 

때 없이 애가 마르는 통영 어느 물살 같아

 

돌아올 길 아예 잃은 무지외반 탁발처럼

 

먼물에도 자분자분 귀밑 세는 여진은

 

바람의 여음을 짚다 혀를 데인 풍경風磬 같아

 

 

 

 

시래기의 힘 - 우은숙

 

 

행여, 기죽지 마라

환절기 몸살이다

맨 처음 네 입술이

세상 향해 삐죽일 때

 

성급히

너를 잊고자 흰눈을 기다렸다

 

그 겨울 오고

곤궁해진 오후 2

행여 기죽지 마라

나는 새로 태어난다

 

뜨겁게

몸 던진 순간 함박눈이 내린다

 

대붕의 날개짓으로

세계를 받치던 힘

이제는 실직 앞에

허공 품는 시래기지만

 

절대로

기죽지 마라

당신은 아

 

 

 

 

소금쟁이 - 이애자

 

 

몰입이 무섭네요

각 잡힌 스텝 보세요

 

달리 쟁이겠습니까만

조력자가 있네요

 

그대의 그림자가 늘

물밑을 괴고 있네요

 

 

 

 

이상기후 - 이송희

 

 

액정 나간 핸드폰을 수리점에 맡긴 날

 

당신의 번호가 떠오르지 않아서

 

막연한 숫자 누르다

낯선 이름 불렀지

 

빈 화분 머물다 간 빛바랜 바람 소리

 

먼지 낀 창문들이 기억을 들춰내면

 

길 건너 풍경 하나가

지워지는 중이야

 

뼈마디 맞추느라 우린 오래 흔들렸지

 

죽은 듯 잠든 시계

오늘은 며칠인가

 

냄비엔 펄펄 끓다가

식어버린 혼잣말

 

 

 

 

줌인(Zoom In) - 한분옥

 

 

지친 잠의 머리맡에 너를 맡겨놓고

어느 자오선을 밀 거냐 당길 거냐

먼 날의 신접살림에

나 하나의 달로 떠서

 

너와 나 사이에 하 세월의 강은 흘러

날숨이 긴 날이면 종일토록 맴을 돌다

푹 삭은 애간장 두고 생손톱을 깎느니

 

창밖 북두성이 귀엣말을 건네더니

가까이 당길수록 네 목소리 들리는 듯

짧아서 봄밤이더냐

나 네 곁의 달로 떠서

 

 

              *정드리문학 제11박수기정 관점(문학과 사람,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