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moon'에서(2)

김창집 2023. 8. 7. 00:07

 

심우도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 멍에도 꼬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죽비처럼 꼬리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소는 걸어가면서도 텅텅텅 똥을 잘 싼다 풀을 먹고 자란 소들이 풀에게 밥을 준다 나도 소나무 그늘에 앉아 바다를 보다가 소들이 들어간 숲으로 따라 들어간다

 

  숲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찢는다 소나무가 없어져야 땅값이 오른다며 소나무를 죽이고 있다 그해 겨울의 숲처럼 숲은 온통 소나무 무덤이 된다

 

  숲에 소나무가 없다 소들이 함께 모여서 쉴 곳이 없다 가시덤불 속에서 가시에 찔리며 소들이 서 있다.

 

  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렵게 새로 돋아나는 소나무 새싹에 콧김을 불어 넣는다

 

  나는 심우도(尋牛圖) 밖으로 나와 심우도(心牛圖)를 그린다

 

 

 

 

몌별

 

 

볕뉘 하나 없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음지식물로 자라야만 했던 친구야

성산일출봉에서 햇빛 한 짐 가득

바지게 넘치도록 짊어지고 가서

너의 아침 앞마당에

환하게 부려놓고 싶은 오늘

나의 낡은 지게가 보이지 않는구나

아버지의 깊은 그늘 짊어지고 가서

아득한 산속에 그냥 두고 왔었구나

그날 받쳐두고 온 지게 작대기

너의 늦은 소식이 부러뜨리는구나

음지식물 같은 달이 되어 살다 보니

달빛과 햇빛은 서로 만날 수 없구나

언젠가 아픈 고향에서 다시 만나자

너는 또 이어도의 햇빛인지 달빛인지

한 동이 이고 태평양을 건너가는구나

우리는 이렇게 먼 그대가 되어가는가

대추나무에 추억들만 아그데아그데.

 

 

 

 

 그믐달

 

 

새벽부터 달이 운동하고 있다

당뇨병이 깊어지는 것일까

근육 하나 없이 뼈만 남은 그믐달

아침저녁으로 동네를 몇 바퀴 돌던 어머니

이러다 봉사 되면 어쩔거나

자꾸만 눈을 비비시던 어머니

벌써 합병증이 깊어진 것일까

눈이 어두워 밤새 집을 찾아가지 못한 것일까

날은 추워지는데 집 앞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운동해도

더 이상 근육이 늘어나지 않는 그믐달

아직은 따뜻한 나의 손을 아침 햇빛으로 내민다

 

 

  

 

 다랑쉬

 

 

다랑쉬에는 다랑쉬마을이 들어있다

오름은 움푹해진 백록담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평생 달과 함께 살았다

집들이 모두 불타고 굴속으로 들어갈 때도

달과 함께 가새쑥부쟁이와 시호꽃을 피웠다

 

사람들이 다랑쉬굴 안에서 연기가 된 뒤에도

달은 잊지 않고 찾아와 섬잔대와 송장꽃을 피웠다

 

무쇠솥과 항아리와 놋수저와 신발만 남기고

열한 명이 들려 나와 바다로 떠난 이후에는

더 이상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어둠 속에서는 아홉 살 아이가 울고 있는데

벗겨진 신발 찾으러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잠겨버린 어둠은 열리지 않는다

 

달이 찾아와 소리쳐 불러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곁에 있는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높은오름

돝오름 둔지오름이 힘을 합쳐도 문을 열 수가 없다

 

남아 있는 늙은 팽나무가 그저 바라볼 뿐

무너진 돌담도 집터도 우물터도 안으로 눈물 흘릴 뿐

 

달을 따라서 달의 고향으로 온 나도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

 

 

 

 발자국 밥그릇

 

 

눈이 온다 하늘이 온다

하늘의 식구였던 눈이 온다

하늘의 식구였던 하늘이 온다

눈이 쌓인다

하늘이 내려 쌓인다

큰일이다 큰일났다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는다

오려거든

더 빨리 펑펑 쏟아 부어라

우리들이 벗어놓은

발자국 가득 쌓여 넘쳐버려라

거꾸로 벗어놓은 발자국이

차라리 하늘이 되어버려라

큰넓궤에서부터 따라오는 발자국이

자꾸만 우리들의 목숨을 따라오고 있다

왕오름을 지나고

이스렁오름을 지나고

어스렁오름을 지나고

산짐승도 내려가 텅 빈 볼레오름에 다 오도록

우리들의 발자국은 하늘이 되지 못하는구나

고봉밥이 되지 못하는구나

발자국 밥그릇에 하늘을 다 담지 못하는구나

, 존자암의 염불소리도

부처님께 올리는 삼시 세 때 공양도

우리들의 발자국 그릇을 다 채워주지는 못하는구나

하늘의 눈꽃만 지상에 피어나

참나무들의 겨우살이 열매 눈빛이 더욱 붉어지더니

덜 채워진 하늘이 결국 붉게 엎어지고 마는구나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moon(시산맥사,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