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5)에서

김창집 2023. 8. 8. 00:11

*대장간(김득신)

 

대장장이의 망치질

 

 

날씨가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망치질 소리는 여전히 크게 들린다

 

들어서는 인기척에도 아랑곳없이

망치질에 열중인 대장장이의 눈은

알게 모르게 붉은 물이 든 지 오래다

 

소리와 소리가 격렬히 부딪치는

망치질에는 대장장이의 오랜

기원도 함께 섞여있음이 틀림없다

 

이유 없이 하늘이 흐린 날에는

대장간 구석에 쌓여 있는 낫들이

세상의 을 자르는 들이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춤을 춘다

 

대장장이는 하루도 쉬지 않는다

터지는 불빛을 보며 쇠를 달구고

거친 망치질로 생애를 담금질한다

 

빠르게 쌓이는 권태를 물리치면서

 

 

 

 

사막을 걸으며

 

 

회색빛 바람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팽이처럼 돌다 멈춘 모래 알갱이들이

자잘하게 움푹 팬 구멍에서 멈추었다

발걸음에 수평이 허용되지 않아도

시커먼 구름이 하늘에 떠돌아도

포기하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애써 찾는 곳은

걷고 있는 사막의 원형이었다

바람을 일으키고야 말 고요함이

주위를 온통 감싸고 있었다

다시 태양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강하고 두려운 빛의 물결이었다

오아시스도, 그늘을 만드는 나무도

시야로는 빨리 들어오지 않았다

쉬지 말고 사막을 건너야 할 이유 사이에는

조금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라도 그것을 고민하거나

주저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한 무리의 낙타가 가까이 다가왔지만

대상隊商의 그것에 불과했다

우리에게 걷는 것은 숙명이었다

 

 

 

 

하얀 웃음

 

 

   그림을 그려본 사람은 안다 하얀색은 그냥 아무렇게나 칠해진 하얀색이 아니다 하얀색 속에는 검정색, 황토색, 초록색 등 여러 가지 색이 끊임없이 숨 쉬고 있다 하얀색은 다른 색과 결합하여 드러난 것일 때 비로소 입체적 느낌을 준다 하얀색은 많은 색의 혼합 과정을 거쳐 빚어진 색임이 분명하다

   겉으로는 하얀색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하얀색을 말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하얀색이 다른 색을 지시하는 하얀 전쟁, 하얀 죽음 들이 그 예들이다 사람들의 입에서 연출되는 하얀 웃음은 웃음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판단을 망설이게 한다

 

 

 

사랑한다는 말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에서 알 수 있듯이, ‘말씀은 모든 것이 근원, 세상의 완전한 현존이었다 사람들은 갈리리 태생인 베드로의 말투를 듣고 너도 예수와 한패라고 말했다 옛날에도 사람의 말투는 말하는 사람의 인품을 드러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말의 의미를 다르게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선편에 놓인 주장에 따르면, 말의 의미는 확정되지 않는다 의미의 효과는 한 의미와 다른 수많은 의미들과의 차이에서 발생하므로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가 확정되는 일은 자꾸 연기될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쉽게 건넬 수 없는 이 현실이 참으로 아득하다

 

 

 

 

서투른 곡예사

 

 

서투른 곡예사曲藝師

우리는 다르지 않았다

 

높이 3m의 줄 위에서

공중 회전하던 곡예사가

딱딱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과 함께

그동안 품었던 곡예사의 희망이

공연장 주위에 흩뿌려졌다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도 곡예사가 되어

막장 같은 세월의 둔덕을

자주 오르내렸지만 마지막에

남은 것은 오로지 빈손이었다

물살이 아주 세고 깊은 강을

참으로 어렵게 건널 때도

손짓하며 길을 알려 주는

친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딱딱한 바닥으로 금방 떨어진

서투른 곡예사와 지금의 우리는

아무리 보아도 다르지 않았다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황금알,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