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래는 죽지 않는다 – 장문석
오해하지 마시라 우리는 물고기가 아니야
같은 물속에 산다고 툭하면 육법전서를 들이대는데
우리 그 따위 그물망에 걸리지 않아 말하자면
너희들과는 근본적으로 혈통이 다르다는 얘기지
아마 보았을 거야 너희들의 아가미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창공을 향해 분수처럼 치솟는 무지갯빛 허밍 코러스를
물론 우리에게는 암흑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야
바다의 치안이 부실해진 틈을 타 무법천지로 날뛰며
우리 족속의 등줄기에 사정없이 작살을 내리꽂던
그 엄혹한 중세를 우리는 역사서에 꼼꼼히 적어 놓았지
우리 조상의 내장과 지방질로 짜낸 등불을 밝히고
성스러운 살점을 뜯어먹던 적들의 만행을 읽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권토중래를 노렸는지
아는지 모르겠네 얼마 전 새로운 법령이 공포된 것을
거기에 금박으로 쓰여 있으되, 물의 것들이여
공연히 비루한 거품 일으키지 말 일이며
때 되면 기어이 제물이 될지어니……
그래, 그게 이 바다의 변함없는 율법이야
너희들이 아무리 떼를 지어 촛불을 들고 목청을 높여도
우리는 죽지 않아 영원히
♧ 술의 변증법 – 나병춘
술도
예술도
입술도 아니다
배가 고플 때 뜨는
한 술의 술
고봉밥에 술술
피어나던 엄니의 숨결
잔잔하게 스며들던
자장가 한 가락
영혼이 고플 때
흘러나오는 휘파람 소리
그대 입술로 읊조리는
절창의 시 한 편
그 한 술
어찌 잊을 수 있을쏘냐
♧ 쇠고기 한 근 -정성수
뛰는 소를 보면 암소인지 수소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궁뎅이를 씰룩거리며 뛰는 소는
눈감고 맞춰도
암소다
가랑이 사이에서 종소리가 나도록 뛰는 소는
보나 마나
수소다
암소와 수소의 차이는
쇠고기
한 근에 있다
♧ 백로의 날개짓 – 백수인
백로의 하얀 날개짓을 찍으려고
강변으로 가네
가만가만 다가가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백로는 화들짝 놀라
날개를 쫙 펴며 달아나네
이미 카메라 속에선
백로 파닥거리는 소리 들리네
어린 시절 밤길을 걷고 있었네
갑자기 공중에서 빛이 내려와
내 몸에 화살처럼 꽂히기 시작했네
화들짝 놀라 혼비백산 도망쳤네
카메라 한 대가
머나먼 어느 행성에서 날아와
지구의 한 아이를 찍고 있었네
퍼덕거리며 내는 숨소리를 담고 있었네
어린 나의 날갯짓이
우주의 어느 별, 어느 벽에 붙박여
지금도 파르르 떨고 있는지 모르겠네
♧ 과수원 – 도경희
트실트실 몸둥이 검은 나목들
동산에서 서산에 이르기까지
상징 다 생략한 뼈로
숨결 풀어 허공에 거는
나무들의 정직한 그림을 본다
비빌 언덕 하나 없어라
내심에 이는 불길
쉼 없이 불매질 하는 청춘은
한 그루 나무로 서고 있다
작고 크고 퍼지고 훌쭉한 가슴마다
입춘첩 붙이는 날
곧 새들이 될 잎사귀
초록 눈 뜨겠다 수렁거리겠다
새벽에로 날아가는
물집 잡힌 뒤꿈치 위로하는가
두툼하고 그윽한 웃거름 향내 은혜롭다
*월간 『우리詩』 8월호(통권42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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