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1)

김창집 2023. 8. 9. 00:24

 

 

고래는 죽지 않는다 장문석

 

 

오해하지 마시라 우리는 물고기가 아니야

같은 물속에 산다고 툭하면 육법전서를 들이대는데

우리 그 따위 그물망에 걸리지 않아 말하자면

너희들과는 근본적으로 혈통이 다르다는 얘기지

아마 보았을 거야 너희들의 아가미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창공을 향해 분수처럼 치솟는 무지갯빛 허밍 코러스를

 

물론 우리에게는 암흑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야

바다의 치안이 부실해진 틈을 타 무법천지로 날뛰며

우리 족속의 등줄기에 사정없이 작살을 내리꽂던

그 엄혹한 중세를 우리는 역사서에 꼼꼼히 적어 놓았지

우리 조상의 내장과 지방질로 짜낸 등불을 밝히고

성스러운 살점을 뜯어먹던 적들의 만행을 읽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권토중래를 노렸는지

 

아는지 모르겠네 얼마 전 새로운 법령이 공포된 것을

거기에 금박으로 쓰여 있으되, 물의 것들이여

공연히 비루한 거품 일으키지 말 일이며

때 되면 기어이 제물이 될지어니……

 

그래, 그게 이 바다의 변함없는 율법이야

너희들이 아무리 떼를 지어 촛불을 들고 목청을 높여도

우리는 죽지 않아 영원히

 

 

 

 

술의 변증법 나병춘

 

 

술도

예술도

입술도 아니다

 

배가 고플 때 뜨는

한 술의 술

고봉밥에 술술

피어나던 엄니의 숨결

 

잔잔하게 스며들던

자장가 한 가락

영혼이 고플 때

흘러나오는 휘파람 소리

 

그대 입술로 읊조리는

절창의 시 한 편

그 한 술

어찌 잊을 수 있을쏘냐

 

 

 

 

쇠고기 한 근 -정성수

 

 

뛰는 소를 보면 암소인지 수소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궁뎅이를 씰룩거리며 뛰는 소는

눈감고 맞춰도

암소다

가랑이 사이에서 종소리가 나도록 뛰는 소는

보나 마나

수소다

암소와 수소의 차이는

쇠고기

한 근에 있다

 

 

 

 

백로의 날개짓 백수인

 

 

백로의 하얀 날개짓을 찍으려고

강변으로 가네

가만가만 다가가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백로는 화들짝 놀라

날개를 쫙 펴며 달아나네

 

이미 카메라 속에선

백로 파닥거리는 소리 들리네

 

어린 시절 밤길을 걷고 있었네

갑자기 공중에서 빛이 내려와

내 몸에 화살처럼 꽂히기 시작했네

화들짝 놀라 혼비백산 도망쳤네

 

카메라 한 대가

머나먼 어느 행성에서 날아와

지구의 한 아이를 찍고 있었네

퍼덕거리며 내는 숨소리를 담고 있었네

 

어린 나의 날갯짓이

우주의 어느 별, 어느 벽에 붙박여

지금도 파르르 떨고 있는지 모르겠네

 

 

 

 

과수원 도경희

 

 

트실트실 몸둥이 검은 나목들

동산에서 서산에 이르기까지

상징 다 생략한 뼈로

숨결 풀어 허공에 거는

나무들의 정직한 그림을 본다

 

비빌 언덕 하나 없어라

내심에 이는 불길

쉼 없이 불매질 하는 청춘은

한 그루 나무로 서고 있다

 

작고 크고 퍼지고 훌쭉한 가슴마다

입춘첩 붙이는 날

곧 새들이 될 잎사귀

초록 눈 뜨겠다 수렁거리겠다

새벽에로 날아가는

 

물집 잡힌 뒤꿈치 위로하는가

두툼하고 그윽한 웃거름 향내 은혜롭다

 

 

                           *월간 우리8월호(통권4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