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드리 창'에 비친 좋은 시조 10선(2)

김창집 2023. 8. 10. 03:44

 

 

기왕 김수환

 

 

기왕이라는 왕 있었네

슬픈 왕이 있었네

 

이래도 저래도 슬플 뿐인 거였다면

그 세월 나랑 기쁘고 나하고 슬프지

 

어차피 빈 배로 갈 거 같았으면

먼지같이 가볍게 그늘같이 숨어 있을

나 태워, 없는 듯 가지 나를 좀 데려가지

한 겨울 마음만 남아 눕지도 못하는

마른 풀처럼 외로울 거면 나하고 외롭지

곧 녹을 숫눈과 같이 사랑할 거면 나랑 하지

 

그도 저도 아니면 징표라도 주고 가지

어느 날 아무 때 목줄 하나 주고나 가지

 

나와는 멀고 먼 폭군

기왕이라는 왕이 있었지

 

 

 

 

- 공화순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 없는 무늬들

 

나무의 결 같기도 하고 물의 흐름 같기도 하고

지나온 시간의 부름켜, 누군가의 궤적 같은

 

어쩌면 내 안에도 수많은 흔들림이

흐르다가 멈추며 몸을 켜고 있겠지

 

결이 더 치밀할수록

그 속은 난해하다

 

 

 

 

봄눈, 밤눈 - 이토록

 

 

이 상처는 덧나서 꽃으로 필 것이다

 

골목을 서성대는 비천한 미련들아

찢어져 펄럭거리는 마음의 비닐들아

 

너를 할퀸 살점이 손톱 밑에 박힐 때

고통이 없었다면 난 아물지 못했다

가슴에 긴 고드름을 꽂던 밤이 있었다

 

아직도 발자국은 바닥을 후벼 파고

담벼락 틈새마다 잠꼬대가 들린다

 

치명에 안부를 묻는, 이 소란한 침묵들

 

 

 

 

별빛의 말 - 김태경

 

 

슬픔의 친구들은 몇 호에 살고 있을까?

 

유리 아파트는 사계절이 겨울이었다

 

오늘도 유리된 사람이

몸의 불을 끄고 있다

 

별빛은 모음으로 이루어진 독백이다

 

네게 가면 독백은 고백처럼 환해진다

 

별빛은 36.5

말에는 온기가 돈다

 

별빛이 다치고 닫힌 유리문을 통과한다

 

안부는 누군가의 혼잣말을 눈 뜨게 하고

 

차갑던 슬픔의 파편도

별이 되어 흩어진다

 

 

 

 

동문아리랑 1 - 김현진

 

 

까만 손톱으로 하얗게 간 쪽파 몇 줌

그 옆에 마른 고사리 오분작도 한 접시

맨바닥 봉다리 행렬 아리아리 동문시장

 

장사가 뭐 별건가 궤짝만 엎으면 되지

명함 한 장 내밀듯 간판마다 고향 이름

상 갑써, 싸게 줄랑께반반 섞인 사투리

 

나는야 서울 토박이 어쩌다 흘러와서

오메기뜻도 모른 채 오메기 오메기떡장수

아리랑 동문아리랑 내 곡조도 실린다

 

 

         *정드리문학 제11박수기정 관점(문학과 사람,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