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조(3)

김창집 2023. 8. 11. 00:08

 

 

농막일기 - 오영호

 

 

한라산 정기서린 금월길 69번지

두 칸 연담별서*를 사철 경호하는

귤나무, 감나무 비파 모과 황칠 두릅나무

 

연통이 끌어안은 회색 벽 바로 앞에

녹슨 문 덜컹거리는 돌벽 창고 하나

서로가 쳐다만 볼 뿐 한 마디 말이 없는

각색의 사람들이 농막에 찾아들면

낡은 카세트의 클래식 선율 따라

추사와 괴테 장자 소월이 책장을 걸어 나오고

방안을 가득 채우는 오가는 말의 향기에

참새 직박구리 입 닫고 나무에 앉아

귀 세워 풍류(風流)를 즐기는지 떠날 줄 모르는

 

꽃샘추위 물렀거라 자투리 흙 가슴에

호박 고추 상추 가지 무 배추씨 심어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웰빙 밥상을 꿈꾸고

설레는 5월 바람이 가다가 돌아오듯

짙은 귤꽃 향기에 발 멈춘 그대여

꿀벌들 윙윙 소리에 온 섬이 분주하네

 

물외** 냉국으로 더위를 식혀봐도

잎이 타들어 가는 감나무 밑에 서면

하늘도 아픔을 아는지 먹장구름 부르네

쏟아지는 소낙비에 목 축이는 풀 나무들

오그린 발을 뻗고 늘어진 어깰 펴면

똬리 튼 집착도 생채기도 떨어져 나가는 것을

 

대숲을 흔들어대는 삽상한 가을바람에

감나무 푸른 잎이 하나둘 물들어가고

그대는 시월의 연정 낯붉히는 단감이라

 

눈보라 받아치는 빨간 함석지붕 아래

해와 달 별빛 받은 동행의 배를 타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노 젓는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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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호(堂號)

**토종오이

 

 

 

 

사월 고사리비 이애자

 

 

두둑이 솜을 넣어 외지로 보낸 날부터

소복이 고봉 밥 조왕*에 올린 날부터

주루륵 하루만 오고 그칠 일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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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의 제줏말

 

 

 

 

누명 조한일

 

 

실외기 문 왜 닫았나 다짜고짜 타박이다

내가 닫은 게 아니다 억울하다 읍소해도

도무지 안 믿는 아내 누명 쓴 한여름밤

 

번뜩 생각이 난 아파트 밴드 게시물

부리나케 그 문구를 눈앞에 내밀었지

바람이 세게 불 경우 저절로 닫힐 수 있다

 

 

 

 

봄이 오나 봐 - 한희정

 

 

어쩌자고 지난봄에 심어놓은 토란 몇 개

푸른 우산 곡예사의 물방울 변신인가

입춘녘

오백나한이

땅속에서 솟았네

 

치맛자락 잘라내어 겨울나기 입성 반듯

다산의 산후통에 안고 업고 매달려도

그 오래,

설문대할망

허리 꼿꼿 서있네

 

엄동 견딘 푸른 멍에 실낱같은 봄이 오네

굳은살 박박 벗겨 허연 얼굴 맞대고 보니

! 벌써

봄이 오나 봐

손바닥이 가렵다

 

 

 

 

[동시]

 

 

고래나무 양순진

 

 

고래는 일생

푸른 바다 누비다가

 

서서히

바다 속으로

잠긴대요

 

바다 속으로 들어가

한 그루 나무 된대요

 

죽어서도 죽어서도

바다 식구들

먹여 살린대요

 

고래는

바다의 엄마

 

죽어서도 바다 지키는

지구의 엄마

 

 

          * 계간 제주작가2023년 여름호(통권 8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