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막일기 - 오영호
한라산 정기서린 금월길 69번지
두 칸 연담별서*를 사철 경호하는
귤나무, 감나무 비파 모과 황칠 두릅나무
연통이 끌어안은 회색 벽 바로 앞에
녹슨 문 덜컹거리는 돌벽 창고 하나
서로가 쳐다만 볼 뿐 한 마디 말이 없는
각색의 사람들이 농막에 찾아들면
낡은 카세트의 클래식 선율 따라
추사와 괴테 장자 소월이 책장을 걸어 나오고
방안을 가득 채우는 오가는 말의 향기에
참새 직박구리 입 닫고 나무에 앉아
귀 세워 풍류(風流)를 즐기는지 떠날 줄 모르는
꽃샘추위 물렀거라 자투리 흙 가슴에
호박 고추 상추 가지 무 배추씨 심어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웰빙 밥상을 꿈꾸고
설레는 5월 바람이 가다가 돌아오듯
짙은 귤꽃 향기에 발 멈춘 그대여
꿀벌들 윙윙 소리에 온 섬이 분주하네
물외** 냉국으로 더위를 식혀봐도
잎이 타들어 가는 감나무 밑에 서면
하늘도 아픔을 아는지 먹장구름 부르네
쏟아지는 소낙비에 목 축이는 풀 나무들
오그린 발을 뻗고 늘어진 어깰 펴면
똬리 튼 집착도 생채기도 떨어져 나가는 것을
대숲을 흔들어대는 삽상한 가을바람에
감나무 푸른 잎이 하나둘 물들어가고
그대는 시월의 연정 낯붉히는 단감이라
눈보라 받아치는 빨간 함석지붕 아래
해와 달 별빛 받은 동행의 배를 타고
이어도, 이어도 사나 노 젓는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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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호(堂號)
**토종오이
♧ 사월 고사리비 – 이애자
두둑이 솜을 넣어 외지로 보낸 날부터
소복이 고봉 밥 조왕*에 올린 날부터
주루륵 하루만 오고 그칠 일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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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뚜막의 제줏말
♧ 누명 – 조한일
실외기 문 왜 닫았나 다짜고짜 타박이다
내가 닫은 게 아니다 억울하다 읍소해도
도무지 안 믿는 아내 누명 쓴 한여름밤
번뜩 생각이 난 아파트 밴드 게시물
부리나케 그 문구를 눈앞에 내밀었지
“바람이 세게 불 경우 저절로 닫힐 수 있다”
♧ 봄이 오나 봐 - 한희정
어쩌자고 지난봄에 심어놓은 토란 몇 개
푸른 우산 곡예사의 물방울 변신인가
입춘녘
오백나한이
땅속에서 솟았네
치맛자락 잘라내어 겨울나기 입성 반듯
다산의 산후통에 안고 업고 매달려도
그 오래,
설문대할망
허리 꼿꼿 서있네
엄동 견딘 푸른 멍에 실낱같은 봄이 오네
굳은살 박박 벗겨 허연 얼굴 맞대고 보니
아! 벌써
봄이 오나 봐
손바닥이 가렵다
[동시]
♧ 고래나무 – 양순진
고래는 일생
푸른 바다 누비다가
서서히
바다 속으로
잠긴대요
바다 속으로 들어가
한 그루 나무 된대요
죽어서도 죽어서도
바다 식구들
먹여 살린대요
고래는
바다의 엄마
죽어서도 바다 지키는
지구의 엄마
* 계간 『제주작가』 2023년 여름호(통권 81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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