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완생을 꿈꾸는
미생에게 바칩니다.
2023년 8월 2일
♧ 바둑
내 돌 하나 날라다 놓으면
너도 하나 날라다 놓고
내 집 한 채 지을 때 너도 집 한 채 지으면
그럭저럭 서로 살자고 할 것을
내 살려 터 닦은 곳에
자네가 돌 하나 탁 던져 놓으면
나도 자네 집터에 돌 던지고 싶고
이러저러 서로의 집이 부서지고 깨지고
나 한 번 자네 한 번
흑색이고 백색이고
서로 담장에 색칠만 달리해서
둥가둥가 어울려 살면 될 거인데
어허라 싸우고 어우러지고
힘센 놈이 이기는 게
그런 게 세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슴 아픈
집 없이 떠도는 설움
반반한 내 터에 내 기둥 하나 세워
한 계절 흐르니
그대 또한 한 계절을 기둥 세워
하늘 한 번 바라보고
마주 보고 내 다시 기둥 세우고
그대 또한 어우러지니
잔잔한 세계에 흰 별 검은 별
슬며시 내려와 자리 잡아
어느 순간에 삶의 이야기가 되고
세상사는 노래가 되고
♧ 수담(手談)
내가 하는 말보다
상대가 하는 말을 더 들으려 애쓴다
나는 말을 하였으되
상대가 모르길 바라고
상대가 하는 말은 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나는 이중 삼중의 뜻을 말하고
상대가 하는 말은
그 중 제일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러고 그에 맞는 답을 내가 해야 하는 것
손짓 한 번에 세계를 담고
손과 손이 오가며 우주를 담아내는
바둑판 속 돌들의 언어
♧ 축
힘이 없는 나는 쫓기고 있다 외길이다
내가 갈 길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놈은
끈질기게 쫓아오며 목을 죄어오고 있다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머리를 두드리며
양쪽을 번갈아 길을 막아서는 상대는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자칼처럼 날쌔다
나는 결국 동료들과 멀리 떨어진
가젤처럼 최후를 맞을 것이다
♧ 장문(藏門)
그물에 갇혀 버렸다
조금만 더 가면 친구가 저기 보이는데
촘촘한 그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물고기
서서히 말라가는 내가 보인다
비옵니다! 비옵니다!
비록 내가 살지 못한다 해도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 양동림 시집 『여시아문』 (한그루, 2023)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78주년 광복절 아침에 (0) | 2023.08.15 |
---|---|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2) (0) | 2023.08.13 |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조(3) (0) | 2023.08.11 |
'정드리 창'에 비친 좋은 시조 10선(2) (0) | 2023.08.10 |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1) (1) | 2023.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