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moon'에서(3)

김창집 2023. 8. 16. 00:08

 

 

뼈와 인대

 

 

조개 한 마리

뼈 사이에서 조용히

부드러운 살을 내밀고 있다

 

위험을 감지한

조개 한 마리

부드러운 발을

뱃속으로 숨기고

꽉 다물어 버린다

 

밖에서는 더 이상

조개의 문을 열 수 없다

양쪽에 붙어 있는

하얀 인대가

뼈보다 힘이 더 세다

 

세상은

뼈가 아니라

인대가 움직인다

 

 

 

 

딸꾹질

 

 

요즘 자동차들은

달리기 시작하면

철커덕,

감옥의 문이 잠긴다

문에 기대어 쉬던

하느님이 놀라

비틀거리며

잠금 버튼을 누르신다

공기가 오염되어

숨쉬기 어렵다고

딸꾹질하며

하느님이 가둔다

나는 걷는다

감옥의 문이 싫어져서

천사들이 좋아져서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

거리에서는 아직도

나의 포깍질 소리와

하느님이 딸꾹질 소리가 들린다

 

 

 

 

관덕정

 

 

죽어서도 오백 년 천 년

쓰러지지 않는 나무가 있다

살아서도 투표용지 같은

잎들만 떨구는 나무가 있다

 

관덕정 앞 광장에

분홍달맞이꽃이 피어난다

꽃들의 가슴 속에

불씨가 숨어 있다

 

보도블록을 들썩이는

뿌리들이 있다

화살 같은 햇살을 받으며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지금도 관덕정에서는

이재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덕구의 피냄새도 풍긴다

이승만 꼭두각시도 보인다

 

별들이 켜놓은 꽃불이 피어난다

꽃들이 켜놓은 혼불이 반짝인다

심장 같은 나뭇잎이 돋아난다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 나무가 있다

죽어서도 집이 되어주는 나무가 있다

살아서도 심장에 촛불이 꺼진 사람들

살아서도 허수아비 그림자들이 많다

 

 

 

 

폭낭과 야유나무

 

 

당산나무가 나를 업어 키웠다

 

제주도 폭낭들은 오늘도

허리가 휘어지도록

바람을 업어 키우고 있다

 

북촌리 폭낭은 그날을 잊을 수 없다

1949117

그날 보았던 일들이 지워지지 않는다

 

당산나무에 임산부를 매달고

대검으로 찌르는 것을 보았다

총탄에 쓰러진 시체 더미 속에서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

피의 가슴을 빨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피가 솟아나는 순간

천둥소리가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그 미친(美親) 바람은 바다까지 건너갔다

야유나무를 한 번 휘감고

퐁니를 거쳐 퐁넛으로 달아났다

제주도 폭낭처럼 베트남의

그 퐁니 마을 야유나무도 똑똑히 보았다

총소리를 보았고 천둥소리의 뼈를 보았다

1968212일 아침

야유나무는 야유나무 학살을 모두 다 보았다

 

탐라국 폭낭들이 보았고

참파왕국 야유나무가 보았다

그리고 또 다른

당산나무들이 오늘도 똑똑히 보고 있다

 

당산나무는 어미가 되고 싶다

당산나무는 다만 어미가 되고 싶다

당산나무는 이제 다시 어미가 되고 싶다

웃는 아이들을 업어서

웃는 아이로 키울 수 있는 어미가 되고 싶다

 

 

 

 

큰넓궤

 

 

평화로 가는 길에 붉은 상사화 무리지어 피어난다

추석 다음 날 오후 큰넓궤 찾아간다

큰넓궤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해 추석을 어떻게 지냈을까

, 큰 넓궤는 끝까지 눈을 감지 못한 어머니 눈동자처럼

나를 길에서 쏟아버린 어머니의 자궁처럼 나를 맞이한다

서늘한 바람이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싸늘한 정신이 가슴 속을 후벼판다

이곳이 발각되어 볼레오름까지 올라갔던 사람들

그들을 두 달 동안 지켜주었던 입구의 종나무를 본다

그 종나무와 어울려 살고 있는 단풍나무를 본다

홍단풍은 봄부터 붉고 청단풍은 가을에도 푸르다

, 입구가 너무 좁다 기어서도 걸어가기 힘이 든다

차마 돌아갈 수 없어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거꾸로 찍혀있는 발자국처럼 거꾸로 들어간다

이미 흙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눈동자 속으로, 자궁 속으로 기어서 들어간다

멀리 나팔관에서 나팔소리 들려오고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동굴 속 축축한 어둠이 양수처럼 나를 감싼다 이곳에서

붉은 상사화 지는 것도 잊은 채

두어 달 어머니와 함께 종나무로 살다가 다시 태어나,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moon(시산맥,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