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6)

김창집 2023. 8. 18. 07:14

 

 

아침에 외 4김시종(곽형덕 옮김)

 

 

새해 며칠간은 채널을 돌려도

새해를 축복하는 웃음이 넘쳐났다.

화면 한가득 공감을 모으고

또렷이 영봉 후지산도 빛난다.

경사진 들판이 흐릿하고 아득한 도호쿠에서

녹슨 그네가 늘어진 채

삐걱대며 홀로 서지 못 했다.

온종일 바람이 휘몰아치고

사내는 조각상이 돼 고목 그늘에 있다.

싱글벙글한 내가

우연히 그것을 언뜻 보았다.

클로즈업된 그래프가 맹렬히 아래위로 움직이고

주가가 몹시 널뛰는 새해였다.

새해는 벌써 흥청댄다.

머지않아 초목이 움트는 신춘이다.

다시 돌아가지 못 할 집이지만

덩굴 풀 자라고 꽃이 핀다.

풀고사리 무성한 중생대까지도

혹은 넘어야만 할 막막한 시간이

그 언저리에서 떠돈다.

구름은 낮게 드리우고

눈을 뒤집어 쓴 묘비가 쓰러진다

나는 수선화처럼 근심을 또 하나

마음에 안고서

바람 속을 소리 내어 떠드는

뱀밥처럼 시위대의 일단을 쫓는다.

 

 

 

 

부재

 

 

가끔 바람이 그치면

매화가 어슴푸레

축 늘어진 가지 끝에서 부풀어 있다.

수선화도 맨드라미도 백합도

근방에서 예전처럼 피고 졌다.

정신없이 계절은 돌아오고

층적운을 빠져나온 햇살 또한

덧문 밖 툇마루에서 같은 모습으로 졸다 돌아왔다.

 

몇 해 지나갔나.

울타리 족쇄도 풀리고

마음껏 찾아도 되는 귀로가 됐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도무지 부재하며

빛의 가시가 만들어낸 양화만이

대기에 숨어 넘쳐난다.

 

어금니를 깨물고

외면했던 갈림길이었다.

버렸던 고향이 아니라

정주할 수 없는 마을을

그곳에 놓고 왔다.

별안간 기준치 이내가 튀어 오르고

1밀리시버트 연내 피폭한도가

20배가 넘는데도 귀환 가능하다고

마침내 바람도 거꾸로 불고 또 부는가

 

멀리서 소망할 수밖에 없는 애착은 뜬구름으로 흘러가고

꿈이 뒤적이는 꿈처럼

근방에서 살아가

사라졌다.

 

 

 

 

재앙은 푸르게 불탄다

 

 

밥공기, 서랍, 폐자재,

그래도 옛 정취 남기고

울쑥불쑥

모여 살던 생활이 쌓여 있다.

 

아침저녁 빛나던 창문이었다.

웃음 지으며 그 곳에 존재했던 눈동자였다.

통째로 휩쓸린 잔해의 들판에서

바람이 거칠게 자국을 남긴다.

 

확실히 둔치였던 곳이다.

눈꺼풀에 찌든 물굽이 물가다.

쉬고 있던 배마저 밀어 올려서

파도의 산이 허다한 생애를 먼 바다에 가라앉혔다.

 

바다 밑바닥에서 흙투성이 자갈밭 아래에

토사에 가로막혀 움직일 수 없는 생명이 숨 막혀한다.

헐떡이는 마을 사람들의 필사적인 손을 기다리며

찌부러져 딱딱해져 가고 있다.

 

부서진 것들이여.

조각이 되고 잔해가 되고

깨진 거울 파편이 돼

마침내 조용해진 끝없는 침묵이여.

 

온통 휩쓸어도 빼앗을 수 없는 향토다.

재앙은 향토에서 푸른 불을 내 뿜는다.

움찔움찔 찔러

거리가 마을의 빛의 가시에 쪼개진다.

 

눈을 크게 뜨고 본다 해도

고요함에 뒤덮인 어둠을 내다볼 수 없다.

대기의 싹으로 뾰족해진

방사능 방출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한다.

날이 갈수록 격해지는 지구의 거친 한숨을,

저 먼 곳 퍼런 불꽃에 흐려져 가는

울적한 불길의 새빨간 용솟음을.

 

눈부신 낭비에 들떠 있는 것은

이곳에 밝은 자신이다.

편리함에 싱글벙글하며

밤을 내쫓은 불야성에 흡족해 한다.

 

떠올려보라.

산토신(産土神)이 계신 마을의 밤은

경이로움이 지배하는 심오한 어둠이었다.

경외함을 흩뜨리며

재앙은 푸르게 불타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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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배면의 지도(背中地圖)(河出書房新社, 2018)을 저본으로 해서 번역했다.

 

 

 

 

거미집

 

 

후쿠시마 오나미(大波) 지역 길이 젖어 있다.

때 아니게 옆으로 세차게 들이치는 소나기를 뒤집어쓰고

물이 들기 시작한 정원수 잎사귀를 흩뿌리며

채소밭 땅까지 깎았다.

자애로움이여, 우리의 배려는

갈 곳 없는 골칫거리를

시커먼 유연성 용기에 봉인할 수 없다.

과학과 허구의 포옹은

태초의 혼탁함에 소용돌이치고

후쿠시마는 이미 행복한 섬인 복도(福島)가 아니다.

오슈(奧州) 가도의 역참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관문이다.

사념이 얽힌 원자력의 예고가 담장을 온통 둘러치고

주변을 위압하며 우리 내면에 물보라가 낀다.

제염(除染)이라는

처음부터 결정된 허구가 시작된 것이다.

길가에 인접한

자주피난(自主避難) 중인 빈집 벽이 젖어 있다

일찍이 자리를 잡은 것은 무당거미다.

넓게 펼친 거미집에 물방울을 흩뿌리고

닫힌 문짝 안쪽에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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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에 오염된 후쿠시마시에서 제염이 시작된 것은 20111018일이었다. 제염은 오나미(大波) 지구부터 시작됐다.

 

 

 

 

길의 이유

 

 

이 포장도로의 단단한 경계 앞에서

누구든 가다가 해가 저문다.

그대로 얼간이가 된다.

새롭게 마무리된 구획정리처럼

정연히 모범이 교차하며

한들한들 넘을 수 없는 경계가 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난다.

적란운이 정상에서 염료가 돼 녹기 시작한다.

산 끄트머리에 걸린 얼룩 색상에 불길이 인다.

아무리 기세가 좋아도

여기에는 이제 마을 소방관조차 없다.

다만 붉은 게만이

기술의 궁극을 발휘해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상당한 개체의 모반이다.

마침내 눈을 부라린 개의 극한,

나라도 바라볼 위치에 있다면 적의를 드러낸다.

서로 접근할 수 없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적응하는 것이다.

아암 그렇고말고, 돌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해는 진다.

내 배후에서 둑을 넘어 탁류가 넘치고

난바다 쪽 어딘가에서 항로를 잃은 배 한 척

야음을 틈타 목을 쥐어짠다.

멀리서 짖는 소리는 꼬리를 끌고

산기슭 수풀에서 흐르고 있다.

길은 곧바로 바다로 튀나오고

당도하기 전에 없어진다.

그 앞이 원자력발전소다.

 

 

               * 제주작가회의 계간 제주작가여름호(통권 8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