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길 – 정지윤
멀리서 종소리
꽃나무를 흔든다
능선을 자르며 떨어지는 꽃잎들
꽃들이 떨어질 때마다
새들이 날아오른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래가 출렁거린다
언제나 나에게만 들리던 그 노래
망초가 하얗게 흔들리고
시간이 우거져 있었다
♧ 불란지 – 양희영
청수리 곶자왈로
반딧불이 찾아간다
캄캄한 더듬길에
소리도 불빛도 끄고
내 어둠
거두어가는
그 웃뜨르 꽁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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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두 수는 ‘제주를 노래한 시’.
♧ 씨앗의 힘 - 문순자
서울 사는 둘째가 카톡카톡 날 부른다
전시회에 왔다며 보내온 사진 한 장
“이건 뭐?”
내가 묻자 그만 울먹거린다
오래된 주문처럼 여섯 개의 유리병엔
홍두 메밀 흑보리 자색보리 갓 참깨
코르크 마개로도 못 막은
돌아가신 할머니 냄새
만지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좀팍과 푸는체로 까발리던 갯노멀 씨앗
그날 그 감촉이 그만
뇌관을 건드린 거다
♧ 감자 먹는 날 - 조영자
유월 초사흘 달도 어떻게 알고 왔는지
까만 손 여남은 개가 낭푼이에 들락인다
봄 내내 허기진 뻐꾸기 울음 몇 점 보태는 날
안덕면 상창리는 어머니 단골 마을
“자리 삽써, 자리 삽써” 퐁낭 그늘에 장이 섰다
젓자리 한 됫박이면 하지감자 두어 됫박
어머닌 어딜 가나 범섬 자락 안에 든다
자리 몇 줌 슬쩍 건네면 보리밥이 한 그릇
떨이도 다 끝난 구덕 마을 인정 지고 간다
♧ 아버지의 가을 – 강현수
아버지 가슴에도 노을 하나 숨어 산다
11월 과수원은 저 혼자 물이 들고
오래된 기침소리도 상자마다 담는다
가끔 술기운에 그 안 살짝 헐리면
지상의 제삿날엔 찾아오지 않겠단다
한평생 가위손으로 다스려온 이 영역
초고속 카메라에 가을이 툭 걸리면
포르말린 그 냄새도 이골이 나셨는지
병원 행 아예 뚝 끊고 바람에 몸 맡긴다
* 정드리문학 제11집 『박수기정 관점』 (문학과 사람,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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