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3)

김창집 2023. 8. 19. 00:08

 

 

노부부의 통화 이수미

 

 

거기 요양 생활은 지낼 만하오?

입맛 없어도 끼니는 꼭 챙겨 먹고

 

반찬 입에 맞지 않으면 식당가서

입맛 돋우는 걸로 사 먹고

 

아파도 먹어야 통증을 이겨낼 힘이 납디다

꿈에 저승사자 자꾸 온다고 정신 줄은 놓지 마오

 

우리 만나면 손잡고 맛난 거 먹으러 갑시다

이번 항암 치료 마치고 당신 보러 갈 테니

 

여보!

그만 울어요

 

 

 

 

회향 - 도경희

 

 

딸기를 딴다

생수 같은 오월 아침

 

한 생이 붉게 익어

골짜기 가득

아찔한 살 내음 풀어 놓는다

 

열매를 다 내어 준 딸기나무는

밑동째 잘려

어린 것에게

태양을 들여보낸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나 또한

한 해만 살고 가는 들꽃인 것을

 

 

 

 

가장 위험한 동물 이산하

 

 

몇 년 전 유럽 여행 때

어느 실내 동물원을 구경했다.

방문마다 사슴, 늑대, 사자, 악어 같은

동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마지막 방문에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이라고

깊이 새겨져 있었다.

호기심에 얼른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은 텅 비어 있었고 정면 벽에

커다란 거울 하나가 걸려 있었다.

내 얼굴이 크게 비쳤다.

 

 

 

 

사랑, 그거 - 이비단모래

 

 

참 부질없기도 하지만

 

캄캄한 길도 걷게 하고

시큰거리는

무릎도 일으켜 세우는 명약

 

마음 그득히

해 뜨고

해 지고

바람 부는 일

그대에게 향하는 길 되는

 

참 부질없기도 하지만

없으면 안 되는

그대와 내 심장사랑 그거

 

 

 

 

무늬라는 짐승 송연숙

 

 

짐승들의 무늬를 따라

설산과 밀림이 나뉘었을 것이다

 

주변을 먹지 못하는 짐승들은

무늬 없는 캄캄한 밤을 뒤지거나

은밀한 시간을 찾아 잠든다

 

비가 내리고 가속페달을 밟을 때마다

더 깊게 패던 진창

진창을 빠져나오려 몸부림치는

구불구불한 헛바퀴들

처음도 끝도 잃어버린다

 

풀들이 말라가는 건기에 그늘도 말라 간다

꼬리를 높이 세우고

설산의 비탈을 무리 지어 달리는 짐승의 무리

죽은 짐승의 사체를 둘러싸는 무리처럼

마른 진창 주위엔 직립 보행의 무늬들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다

 

진창이 되어

함께 진창을 밀고 끌며 빠져나온 무늬들

불안의 눈빛으로 뒷발을 세우고 있다

 

대물림이란 남겨진 흔적일까

비가 그치고 웅덩이에 비친 그림자가

진창을 끌고 달아난다

 

쨍쨍한 햇볕 아래 어지럽게 엉킨 무늬들은

꼼짝없이 제 엉킴에 갇혀 있다

 

 

                 * 월간 우리8월호(통권422)에서

                               * 사진 : '영장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