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 moon'의 시(3)

김창집 2023. 8. 21. 00:24

 

 

하루

 

 

하루는 24면의 신문이다

나는 자정이 되면 신문처럼

시간을 접어서 쌓아 놓는다

하루를 접어서 쌓아 놓는다

그리고 새로운 신문을 맞는다

가끔은

지난 신문 뒤적거려

먼지만 폴폴 날린다

나는 석간신문일까

너는 조간신문일까

나는 구독자일까

너는 발행인일까

내가 신문(新聞)보다

신문(新門)을 더 좋아하고

신문(新文)을 더 사랑하여

하루가 온통 문과 글로 보인다

하루는 24면의 신문이고

한 해는 365쪽의 책이다

 

 

 

 

소망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여행하고

만 명의 친구를 사귀어라*

 

하지만 나는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단 한 곳을 여행하고

단 한 사람만을 사귀고 싶다

 

나는 평생

단 한 권의 당신을 읽고

단 한 곳의 당신을 여행하고

단 한 사람, 당신만을 사랑하고 싶다

 

이것만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망이다

 

---

*讀萬卷書 行萬里路 交萬人友

 

 

 

 

섯알오름

 

 

섯알오름 연못에 연꽃이 없다

소나무들이 온몸으로 젖으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까치도 보이지 않고

까마귀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오작교가 보이지 않는다

두개골과 척추뼈 하나씩만 묻히고

나머지 살과 뼈와 영혼들이

오름 어딘가에 흩어져

칠석날에도 만나지 못한 채

자꾸만 달과 별들을 부르고 있다

곁에 있는 백조일손묘역(百祖一孫墓域)에도

안장되지 못한 영혼들

섯알오름을 둘러싸고 있다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는 저

소나무들의 뿌리를 힘껏 잡아당기고 있다

길을 가던 달이 별들을 데리고 조문을 온다

소나무가 그들을 맞이한다

소나무들이 자꾸만 발목을 내려다 본다

세들이 조문을 오고 아침이 조문을 오고

동알오름 쪽에서도

조문 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두 개의 연못이 해처럼 환해진다

섯알오름 연못에 오작교 같은 연꽃이 돋아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탑을 돌지 않고 탑 안에서 산다 철탑이나 철근콘크리트탑 안에서 산다 나도 탑 안에서 탑을 쌓으며 살고 있었구나 일 년 동안 급하게 쌓은 탑이 무너지니 비로소 오십 년 동안 쌓아온 탑이 보이는구나

 

  창밖으로 눈발이 뛰어내린다

 

  탑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끝장이다 창밖으로 뛰어내리면 그 탑은 무너지고 만다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눈발을 보며 나는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나의 탑을 다시 쌓으며 보니 나무도 나이테로 탑을 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무는 아직도 탑 속에 살지 않고 탑을 돌고 있다 탑을 둥그렇게 돌며 둥그렇게 길을 만들고 있다 나이테를 둥그렇게 돌며 둥그렇게 쌓고 있다

 

 

 

 

알뜨르비행장 파랑새

 

 

알뜨르비행장에 파랑새 한 마리 착륙했다

단발머리 거인 소녀가 안고 온 파랑새 한 마리

하늘도 파랑새도 소녀도 옷도 모두가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소녀의 대나무 옷을 스치니

내 마음 속으로 대숲이 들어온다

파랑새도 함께 날아서 들어온다

 

대나무는 함부로 꽃을 피우지 않는다

한 계절에 한꺼번에 모두 다 자라고

남은 일평생 제소리만을 가다듬는다

 

중간에 베어서 책꽃으로 피기도 하고

죽창 끝에서 피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대나무의 소망은 오직 소리꽃으로 피는 것

 

한 백 년 쉬지 않고 소리 연습을 마치면

마침내 목이 터져 꽃 한 번 피우고

피리가 되어 가슴 속 파랑새를 불러내리라

 

 

                                *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moon(시산맥, 2023)에서

                                                          *사진 : 남극 황제펭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