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오승철 시인의 대표작]
♧ 송당 쇠똥구리 ․ 1
겨울 송당리엔 숨비소리 묻어난다
바람 불지 않아도 중산간 마을 한 녘
빈 텃밭 대숲만으로 자맥질하는 섬이 있다
대한에 집 나간 사람 찾지도 말라 했다.
누가 내 안에서 그리움을 굴리는가
마취된 겨울 산에서 빼어낸 담낭결석(膽囊結石)
눈 딱 감고 하늘 한 번 용서할 수 있을까
정월 열사흘 날, 본향당 당굿마당
4.3땅 다시 와 본다, 쌀점 치고 가는 눈발.
그렇게 가는 거다. 신의 명을 받아들면
정 하나 오름 하나 휘모리장단 하나
남도 끝, 세를 든 세상, 경단처럼 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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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리 : 구좌읍의 중산간 마을. 멸종 위기의 쇠똥구리는 이 지역 인근 오름 등에서만 볼 수 있다.
♧ “셔?”
솥뚜껑 손잡이 같네
오름 위에 돋은 무덤
노루귀 너도바람꽃 얼음새꽃 까치무릇
솥뚜껑 여닫는 사이 쇳물 끓는 봄이 오네
그런 봄 그런 오후
바람 안 나면 사람이랴
장다리꽃 담 넘어 수작하는 어느 올레
지나다 바람결에도 슬쩍 한번 묻는 말
“셔?”
그러네, 제주에선 소리보다 바람이 빨라
‘안에 계셔?’ 그 말조차 다 흘리고 지워져
마지막 겨우 당도한
고백 같은
그 말
“셔?”
♧ 터무니 있다
홀연히
일생일획
긋고 간 별똥별처럼
한라산 머체골에
그런 올레 있었네
예순 해 비바람에도 삭지 않은 터무니 있네
그해 겨울 하늘은
눈발이 아니었네
숨바꼭질 하는 사이
비잉 빙 잠자리비행기
<4. 3땅> 중산간 마을 삐라처럼 피는 찔레
이제라도 자수하면 이승으로 다시 올까
할아버지 할머니 꽁꽁 숨은 무덤 몇 채
화덕에 또 둘러앉아
봄꿩으로 우는 저녁
♧ ᄆᆞᆷ국
그래, 언제쯤에 내려놓을 거냐고?
혼자 되묻는 사이 가을이 이만큼 깊네
불현듯
이파리 몇 장 덜렁대는 갈참나무
그래도 따라비오름 싸락눈 비치기 전
두말떼기 가마솥 같은
분화구 걸어놓고
가난한 가문잔치에 부조하듯 꽃불을 놓아
하산길 가스름식당
주린 별빛 따라들면
똥돼지 국물 속에 펄펄 끓는 고향바다
그마저 우려낸 ᄆᆞᆷ국,
ᄆᆞᆷ국이 되고 싶네
♧ 사고 싶은 노을
제주에서 참았던 눈
일본에 다시 온다.
삽자루 괭이자루로
고향 뜬 한 무리가
대판의 어느 냇둑길
황소처럼
끌고 간다.
파라, 냇둑공사 다 끝난 땅일지라도
40여 년 <4·3땅>은 다 끊긴 인연일지라도
내 가슴 화석에 박힌 사투리를 쩡쩡 파라
일본말 서울말보다
제주말이 더 잘 통하는
쓰루하시*, 저 할망들 어느 고을 태생일까
좌판에 옥돔의 눈빛 반쯤 상한 고향하늘
‘송키**, 송키 사압서’ 낯설고 언 하늘에
엔화 몇 장 쥐어 주고
황급히 간 내 눈님아
한사코
제주로 못 가는
저 노을을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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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하시 : 일본 대판에 있는 쓰루하시(鶴橋)는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제주도민들이 <평야천>공사를 위하여 노역을 갔다가 집단적으로 모여 사는 곳이다.
**송키 : ‘야채반찬꺼리’의 제주어.
* 『서귀포문학』 2023년(통권 35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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