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장 객석에 홀로 남아
바람 세게 부는 어느 가을날
극장 객석에 홀로 남아
배우들의 목소리가 부딪치던
무대를 천천히 바라본다
아직 남아 있는 배경 그림의
길게 웃자란 대나무 숲에선
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지만
정작 극장에 홀로 남은 이유를
자연스레 깨닫게 하는 기호는
어딘가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한 배우가 분장 그대로인 얼굴로
객석 통로를 천천히 지나간다
옛 그리스의 유려한 그릇처럼
정교하게 잘 짜인 작품에 힘입어
인물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라면
극장의 정해 놓은 기간 동안에는
배우의 위치를 잘 지킬 수 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배우의 연기와 배우의 삶은 다르다
배우의 삶에도, 우리의 삶에도
앞을 가리는 막幕은 아예 없다
돌이킬 수 없는 결말이 있을 뿐
그것은 누구의 삶에도 적용된다
바늘구멍만큼의 조그만 차별도 없이
♧ 낯익은 그림
녹색 공기를 마시며 걸었던 날의 하늘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등산대회장 입구에 도착한 내 눈에 길게 이어진 횡렬 오른쪽으로 슬그머니 끼어드는 중년 남자의 큰 얼굴이 보였다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유유히 흔들렸고 이에 호응하듯 뭉게구름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미 한 차례 언쟁을 벌였던 그들인데도, 산 중턱에 도달하기까지의 더디었던 발걸음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것은 온전한 정신을 휘게 했던 더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겐 오직 남보다 앞서는 일만이 중요했다 하산할 즈음, 산 전체에 한동안 아무런 예고도 없이 큰비가 내렸다 그들은 잠시 큰비를 물리치다가, 한참 앞서가는 발걸음을 쫓는 데에 다시 열중할 뿐이었다
산과의 굳은 약속도 잊은 채, 자기를 버리고
♧ 무대 막이 내릴 때
마지못해 동의하듯, 무대 막이
탁한 공기를 누르기 시작하자
비로소 구석에 모여 있던 침묵들이
여기저기로 빠르게 흩어진다
전개되는 이야기는 생기로 넘쳤고
무대 연기는 대체로 훌륭했다
많은 관객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매달린 잎사귀의 신세는 아닌데도
그의 가슴에는, 품었던 기대와
끝난 뒤의 아쉬움이 여러 번 교차된다
늘 화려했던 조명등이 사라지고
연극의 마지막 무대 막이 내릴 때
그는 자신과 약속한 듯 중얼거린다
실패는 나뿐 운의 소산일 뿐이라고
♧ 시든 꽃잎 하나
봄날, 환한 대낮의 골목길에
떨어져 있는 시든 꽃잎 하나를
걸을 때마다 떠올려보는 일은
목표까지 무사히 항해하는 데에
항상 등대의 임무를 수행했고
저렇게 볼품없이 시든 꽃잎이
어떤 과정을 거쳐 꽃 피우고
골목길에 떨어져 있는지를
아주 명확하게 밝히는 일은
삶의 이력을 해명하는 데에
쓸모 있는 방편을 제공했다
세게 부는 바람을 견디지 못해
골목길에 떨어진 시든 꽃잎을
일부러 수시로 바라보는 일은
삶의 실패를 미리 대비하는 데에
더없이 좋은 지침이 되었다
비록 시든 꽃잎 하나일지라도
♧ 바람, 풍경
도시의 어젯밤 긴 바람이 기어코
아침의 차가운 비를 끌어들였다
아직도 불고 있는 그 바람 속에는
젖은 이야기 조각들이 나선형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검게 비어 있는 건물 유리창 틀에는
정치 구호들이 쉼 없이 나부꼈고
겨우 창문 틈으로 비집고 온 햇살은
돌아갈 채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기억이 공원 벤치에 앉은 나를 찾아와
울고 웃던 시절의 시간을 펼쳐 놓았지만
그것도 조금 뒤에는 석양처럼 시들했다
건물 뒤쪽에서 들려오던 마이크 소리가
다시 불고 있는 바람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하루가 난파하기 전에 나타나는 전조였다
*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 (황금알, 2023)에서
* 사진 : 지리산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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