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 강영은
당신은 나를 건너고 나는 당신을 건너니
우리는 한 불빛에 닿는다
눈발 날리는 저녁과 검은 강물처럼
젖은 이마에 닿는 일
떠나가는 물결 속으로 여러 번 다녀온다는 말이어서
발자국만 흩어진 나루터처럼
나는 도무지 새벽이 멀기만 하다
당신의 표정이 흰색뿐이라면
슬픔의 감정이 단아해질까
비목어처럼 당신은 저쪽을 바라본다
저쪽이 환하다
결계가 없으니 흰 여백이다
어둠을 사랑한 적 없건만
강둑에 앉아 울고 있는 내가 낯설어질 때
오래된 묵향에서 풀려나온 듯
강물이 붉은 아가미를 열고
울컥, 물비린내를 쏟아낸다
미늘 하나로
당신은 내 속을 흐르고 나는 당신 속을 흐른다
♧ 추억의 솔렌자라Solenzara – 강중훈
어젯밤 산책길엔 가마우지 한 마리를 만났네 녀석은 바닷가 바위 끝에 앉아 있었네 놀란 가마우지 날개 펼쳐 떠나려다 그냥 차라리 까맣게 날개 접고 말았네 바위도 가마우지도 까맣고 까매서 눈앞에 보이는 건 모두가 까만 것뿐이었네 오던 길에 다시 돌아본 내 모습도 그새 까맣게 물들어 있었네 젊은 연인 한 쌍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네 콧노래를 부르네 ‘추억의 솔렌자라’
♧ 첫눈 – 강태훈
장독대에 내린 진객
눈부시고 상큼한데
꼬리치며 달려드는
너무나 착한 순둥이
섬의 상징인 영산엔
전설 같은 녹담만설.
♧ 지갑 – 김성수
넓이가 아닙니다
나,
깊이가 아닙니다
나,
높이가 아닙니다
나는,
-햇살 너머너머 손그늘 같은 것
♧ 멀구슬나무꽃 피는 사이 – 강방영
춤!
생각은 동작에 집중
몸은 하나로 통합하고
노래의 길을 따르기
물방울처럼 스며드는 음악
부풀어 오르는 세포들
시간은 새 순처럼 여리다
창 밖 멀구슬나무
잎 벗고 열매 떨구면서 겨울 보내고
다시 보랏빛 꽃 무더기로 서서
몇 곡 더 춤이 지나는 사이에
새들과 함께 날며
꽃들은 열매로 노랗게 익어
은빛 겨울 하늘 구름 위로 가고
노래!
끊어지지 않는 가락
한 발 또 한 발 지친 몸들 이끌어
모든 일들은 뒤에 남겨두라 하고
다른 세상을 찾아서 가는 길
쉬지 않고 나가는 먼 하늘
*서귀포문인협회 간, 『서귀포문학』 2023년(통권35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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