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와 제주상사화(5)

김창집 2023. 8. 28. 00:11

 

 

꽃병 - 이강산

 

 

꽃에 사무쳐 꽃 품고 사는 봄처럼 내 몸의 골짜기마다 꽃이다

 

골짜기가 깊어 꽃도 나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4월은 꽃병처럼 붉다

 

봄 신호등에 걸린 낡은 자동차의 앙가슴에 진달래 두어 가지 꽂혀 있다

 

저 여인도 꽃에 사무쳐 꽃 품고 가는 것이라면 십중팔구 나처럼 꽃병 든 거다

 

 

 

 

밀물과 썰물 백수인

 

 

밀물

나무 한 짐 가득 지고

쿵쾅거리며 산비탈을 뛰어내려오는

일꾼들의 기세다

 

뒷마당에 무거운 짐 다 부려 놓고

막걸리 한 잔 나누는 호흡이다

 

먼 바다에서 건져온

미역, 다시마, 파래, , 청각들을

모래밭에 잔뜩 내려놓고

판소리 한 대목 가다듬는 추임새다

 

이제 비로소

밀물은 스스로 썰물이 된다

 

썰물

모든 욕망 다 버리고 돌아서는

순례자의 뒷모습이다

텅 빈 등허리에 햇빛 쏟아진다

 

꽃상여 메고 돌아가는 골목길에

서럽게 흔들어대는 요령 소리다

 

그들이 다 떠나가고 난 텅 빈 모래밭에는

작은 짐승들이 거닐어도

그 발자국이 깊고 깊다

 

 

 

 

사랑 한 줌 이윤진

 

 

햇살에 머물까

맑은 공기에 눈길이 닿자

온종일 기다림으로 싹튼다

사랑 한 줌

꽃기린의 미소에 닿을 때

입가에 맴도는 이름 은영

글썽이는 쓸쓸함이 묻어날 때마다

조심스레 안부를 묻는 그녀

어둠 속에서 하얀 빛으로 웃는

고운 사랑 한 줌이

창밖을 내다보던 가슴에 향기로 피어난다

늘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

한결같은 마음이 지금까지

첫 만남 그대로 곁을 오랫동안 지켜주었다

날마다 그 사랑이

한 줌 한 줌 깊어지고

가슴은 한없이 따뜻해짐을 서로가 알고 있다

 

 

 

 

나팔꽃 도경희

 

 

부르크담장이 상처투성이다

깃들어 살던 마음인들 그렇지 않았을까

 

나를 숨기고 싶은 날

심장의 사막에 드나드는 아린 바람

무시로 내 낡은 정처를 읽고 간다

 

안으로 감은 손 풀어

길 닦아

여름 한낮을 사푼사푼 놓는 꽃초롱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칠팔월은 궁전 같았지

 

우리 집 아침 두레상에

엄마가 찌개 냄비를 놓을 때

나팔꽃 활짝 피었다

 

 

 

 

사랑합니다 - 이비단모래

 

 

목숨과 바꿔 이 말을 샀다

천금보다 소중한 말

너무 늦었지만 그제야 그 말은

헤프게 써야 함을 알았다

 

이승에서 전해야 했던 마지막 인사는

사랑합니다 한마디 뿐

허공도 받을 수 없는 말을 눈물과 함께

뿌렸지만 눈발처럼 녹아내렸다

 

그 후

주머니에 돈 대신 사랑한다는 말을 채워

꺼내주기로 했다

눈빛 마주친 값으로

손잡은 값으로

같이 밥 먹은 값으로

고마운 값으로

가끔 슬프고 아픈 값으로도

 

후회 없이 쓰기로 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참 이상하게 사랑 합니다는 쓰면 쓸수록

화수분처럼 꽃을 피웠다

 

 

                    *월간 우리』  8월호(통권422)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제주상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