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병 - 이강산
꽃에 사무쳐 꽃 품고 사는 봄처럼 내 몸의 골짜기마다 꽃이다
골짜기가 깊어 꽃도 나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4월은 꽃병처럼 붉다
봄 신호등에 걸린 낡은 자동차의 앙가슴에 진달래 두어 가지 꽂혀 있다
저 여인도 꽃에 사무쳐 꽃 품고 가는 것이라면 십중팔구 나처럼 꽃병 든 거다
♧ 밀물과 썰물 – 백수인
밀물
나무 한 짐 가득 지고
쿵쾅거리며 산비탈을 뛰어내려오는
일꾼들의 기세다
뒷마당에 무거운 짐 다 부려 놓고
막걸리 한 잔 나누는 호흡이다
먼 바다에서 건져온
미역, 다시마, 파래, 톳, 청각들을
모래밭에 잔뜩 내려놓고
판소리 한 대목 가다듬는 추임새다
이제 비로소
밀물은 스스로 썰물이 된다
썰물
모든 욕망 다 버리고 돌아서는
순례자의 뒷모습이다
텅 빈 등허리에 햇빛 쏟아진다
꽃상여 메고 돌아가는 골목길에
서럽게 흔들어대는 요령 소리다
그들이 다 떠나가고 난 텅 빈 모래밭에는
작은 짐승들이 거닐어도
그 발자국이 깊고 깊다
♧ 사랑 한 줌 – 이윤진
햇살에 머물까
맑은 공기에 눈길이 닿자
온종일 기다림으로 싹튼다
사랑 한 줌
꽃기린의 미소에 닿을 때
입가에 맴도는 이름 은영
글썽이는 쓸쓸함이 묻어날 때마다
조심스레 안부를 묻는 그녀
어둠 속에서 하얀 빛으로 웃는
고운 사랑 한 줌이
창밖을 내다보던 가슴에 향기로 피어난다
늘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
한결같은 마음이 지금까지
첫 만남 그대로 곁을 오랫동안 지켜주었다
날마다 그 사랑이
한 줌 한 줌 깊어지고
가슴은 한없이 따뜻해짐을 서로가 알고 있다
♧ 나팔꽃 – 도경희
부르크담장이 상처투성이다
깃들어 살던 마음인들 그렇지 않았을까
나를 숨기고 싶은 날
심장의 사막에 드나드는 아린 바람
무시로 내 낡은 정처를 읽고 간다
안으로 감은 손 풀어
길 닦아
여름 한낮을 사푼사푼 놓는 꽃초롱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칠팔월은 궁전 같았지
우리 집 아침 두레상에
엄마가 찌개 냄비를 놓을 때
나팔꽃 활짝 피었다
♧ 사랑합니다 - 이비단모래
목숨과 바꿔 이 말을 샀다
천금보다 소중한 말
너무 늦었지만 그제야 그 말은
헤프게 써야 함을 알았다
이승에서 전해야 했던 마지막 인사는
사랑합니다 한마디 뿐
허공도 받을 수 없는 말을 눈물과 함께
뿌렸지만 눈발처럼 녹아내렸다
그 후
주머니에 돈 대신 사랑한다는 말을 채워
꺼내주기로 했다
눈빛 마주친 값으로
손잡은 값으로
같이 밥 먹은 값으로
고마운 값으로
가끔 슬프고 아픈 값으로도
후회 없이 쓰기로 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참 이상하게 사랑 합니다는 쓰면 쓸수록
화수분처럼 꽃을 피웠다
*월간 『우리詩』 8월호(통권422호)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제주상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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