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정은 시집 '평범한 세계'의 시(1)

김창집 2023. 9. 2. 08:22

 

 

시인의 말

 

 

아무도

나비의 유년에 대해 묻지 않는다

 

20238

이정은

 

 

 

 

너는 바람이 아니라

 

 

깊도록 걸어도

발등으로 번지는 물결무늬

 

바람 소리에 쓰러져 누워

그물망에 스스로 묶이는

 

너는 바다가 아니라

너는 바람이 아니라

 

흰머리 풀어헤친 흐느낌

아기 발바닥 사이로 스며드는 소금 울음

 

가늘게 떠도는 습자지처럼

은박 입힌 오랏줄

 

걸어 나올 수 없는

푸른 얼룩

 

 

 

 

아프리카 펭귄 애인처럼

 

 

생식기 닮은 펜으로 이력서를 쓴다

샤워하다가 서서 배설하는 미묘함이랄까

세면대에 담배꽁초 비벼 끄다가

왜 남극에 사는 펭귄이 아프리카에 살지

아프리카 펭귄은 그 이유를 툭

장래희망을 몽정하는 남자라고 쓴 이력서 때문

그림자가 달 귀퉁이에 매달리고 잔영들은 춤을 추니

깔깔대고 웃다가 제 머리에 빨간 멍울이 생겼다고

서슴지 않고 뱉는다

 

희미해지는 눈으로 서성거리던 내가

환청으로 꽉 찬 화장실을 잠그려는 손

그 손을 흔들었다

작은 환풍기 너머로 먼지가 날리는 걸 보았거든

여기 헐렁한 도시에는 푸른 버스가 지나가

노란 신호등 깜빡, 아프리카 펭귄이 내렸다

욕조 바닥에서 흥건히 젖은 이력서

흘러내려 뜨끈하게

 

 

 

겨울의 계단

 

 

퇴근이 없는 감정이라니

 

밤의 바깥은 검은색이 아니어서

울음은 비껴가고

젖은 막차는 눕지 않는지도 몰라

 

텅 빈 마을로 우박은 떨어져

겨울의 계단을 기어오르는

어린아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찢어버리고

 

새벽 첫 지하철

야근수당도 없이 꼬부라진

이 지랄 같은 감정이라니

 

계단에 깔린 너의 신문지는 노숙자가 되고

비틀어진 종이컵에 담긴

추위에 떠는 등골 같은 감정이라니

 

 

 

 

평범한 세계

 

 

약재 냄새가 허공을 떠도는 날은

뒤꿈치를 붕대로 감고 싶었다

 

저편과 이편은 상처의 고리일까?

 

다친 문이 열렸다

양복 입은 마네킹이 걸어 나온다

 

방 속에 맺힌 둥근 침대는

문지방에 걸터앉아 웃는다

 

암컷을 낳았다

촛불이 켜져 있지 않은 케이크처럼

 

 

                * 이정은 시집 평범한 세계(시인동네,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