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moon'에서(5)

김창집 2023. 9. 6. 00:45

 

 

산과 바다

 

 

산은 바다의 지붕 위에 떠 있고

바다는 산에서 내려온 물들의 집

 

수직은 수평 위에 설 수 있고

수평은 쓰러진 수직의 잔잔한 잠

 

산의 고향은 바다

바다의 고향은 산

 

하늘이 수직으로 떨어져

단애 아래를 수평으로 걷는다

 

산은 바닥에서 다시 출발하고

바다는 다시 하늘에서 내려온다

 

정방폭포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목숨들

바다에서 다시 날아오르지 못하는 날개들

 

바닥이 너무 깊이 젖어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수평선

 

 

 

 

 

 

오래도록 연꽃을 바라보니

나는 연꽃이 되었다

 

오래도록 나무를 바라보니

연꽃은 목련꽃이 되었다

 

오래도록 산을 바라보니

목련은 산목련이 되었다

 

산목련 아래

따뜻한

나무의자 하나 있다

 

하늘이 내려와 앉을 때마다

함박웃음소리 남몰래 피어난다

 

 

 

 

이리 붙어라

 

 

내가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리 붙어라 놀이하며 지냈다

 

검지 세우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 이리 붙어라

우리 편 하고 싶은 사람 이리 붙어라

사탕 먹고 싶은 사람 이리 붙어라

이런 놀이를 하며

편 가르기 놀이 하며 자랐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참 무서운 놀이였다

우리들은 이렇게

다 함께 잘 사는 법보다

서로 편을 가르면서 자랐다

 

어른이 된 지금도 우리는

이리 붙어라 놀이에 정신이 없다

 

 

 

 

백비

 

 

오후 네 시의 평화공원

온몸이 부서져 내린 보름달 부스러기들이

가을 억새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다시 보름달을 함께 만들기 위하여

가을바람에 온 몸을 내던지며

스스로를 반죽하는 저 빛나는 영혼들

, 어머니가 밀어 만들어 주시던

칼국수 반죽처럼

크고 둥글고 납작하게 늘어나는 흰 영혼의 숨소리들

 

평화공원에 아직은 달이 뜨지 않는다

무지개도 검은 무지개만 떠 있다

거친오름 기슭에 너무 많은 관이 묻혀 있다

관들이 병풍으로 쌓여 있는 위패봉안실 뒤로

행방불명자 비석들이

궤 속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내밀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되었건만

아직은 밤이 더 깊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어머니가 끓여주신 칼국수 함께 먹으려면

우리들의 밤은 더 깊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동굴 속 하얀 혼백의 관으로 누워 있는 저 백비에

저 많은 죽음이 통일의 첫걸음이었다고

저 많은 통곡이 평화의 씨앗이었다고

아직은 새길 수 없어

코스모스는 길 밖에서만 피어나고

어머니가 만드는 칼국수 반죽은 보름달이 되지 못한 채

검은 동굴 속에서 흰 관으로 묻혀 숙성되고 있다

 

 

 

 

섬의 뿌리

 

 

서귀포 문섬의 뿌리를 찾아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파래, 미역, 감태, 모자반, 우뭇가사리가 보인다

고동, 소라, 전복이 보이고 해파리와 멸치 떼가 보인다

 

잠수함을 타고 좀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자리돔, 줄도화돔, 범돔, 놀래기, 쥐치, 아홉동가리, 돌돔

수많은 물고기 떼와 함께 스쿠버 다이버가 놀고 있다

 

해저 삼십 미터, 세계 최대 연산홍 군락지라고 한다

우와, 입이 절로 벌어진다 해송, 해면, 부채산호,

분홍맨드라미산호, 맵시산호, 수지맨드라미산호, 돌산호

섬의 뿌리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살고 있구나

 

해저 사십 미터, 바닥 깊은 곳에 집이 된 난파선이 있다

물에 빠진 배 하나가 저렇게 많은 생명들의 집이 되었구나

나는 비로소 내 마음 속 깊은 바닥에서 난파선을 본다

 

작은 문섬 하나의 뿌리에도 숨결이 저렇게 많은데

한라산 뿌리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살고 있을까

 

나는 아주 잠시

당신의 마음속을 보았을 뿐인데

나의 마음속에는 이제 달고기가 살고

아홉동가리가 살고 자리돔이 살고

민숭달팽이가 살고 망상맵시산호가 살고

해송이 살고 분홍바다맨드라미산호가 살고

나비고기가 살고 놀래미가 살고,

 

내 마음의 난파선이 당신의 집을 짓는다

 

 

               *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moon(시산맥,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