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피리 – 송현숙
라일락 잎새 하나 뜯어
곡조를 실어
네게로 띄운다
어린 날
풀피리를
잘 불던 너
풀피리 연주 시작하면
하나둘
네 곁으로 모여들던
어여쁜 친구들
지금쯤
산 너머 피어오른
저 구름을 보고 있을까
♧ 눈 내리는 밤 – 윤봉택
별들이 지상으로 숨비질*한다.
그때가 언제였을까
금이 간 바위틈 새이로
더러는
낙엽이 되지 못하여 동해 입은 낭섭* 우로
또는
덧난 옹이로 스미며 침향으로 날리는
그렇게
나려 쌓이는 별빛은
물욕의 어둠을 씻고
수만의 아지마다 흰 깁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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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비질 : ᄌᆞᆷ네가 바다에서 작업하는 행위
*낭섭 – 나뭇잎이 제주어
♧ 살얼음 – 윤성조
들숨
잠시 멈춘
새벽
고요
시퍼런 날 위
첫발 딛는
애기 무당
처럼
♧ 노루귀 – 이옥자
이른 봄 산지를 찾아 그리움을 피운다
은빛 솜털에 싸인 보석
길쭉하고 통통한 물음표에서
우아한 느낌표로
다소곳한 봉오리가 면사포를 올린다
꽃잎인지
꽃받침인지
품위가 단연 으뜸이다
내 간과 심장을 훔쳐
꽃잎을 피워
햇볕과 벌
그리고 기름진 별미를 준비해
개미까지 초대한다
누구를 위해 존재한다는
거드름 없이
자신의 삶을
은밀하게 살고 있다
그리움의 색을 입혀
나도 하얀 분홍빛이다.
♧ 다시 마라도에 가서 – 김용길
다시 마라도에 가자
가서 주워온 돌멩이 하나
돌려주고 오자
어느 해 젊은 여름 날
마라도 찾아갔을 때
해안 둘레 벼랑길에서
몰래 주어온 돌
한라산 정 품고 정기서린
검은 돌멩이
세월의 이끼에 덮인
거부의 등 같은
둥글고 넙죽한 돌
언제나 내 책상머리에서
파도소리로 울고
저 혼자 돌아눕지도 못했던
소망과 그리움
이제 그 꿈 풀어주고 오자
내 나잇살 더 오르기 전
저 남단의 끝 섬 찾아가서
돌려주고 오자
제 자리 찾아주고 오자.
*서귀포 문인협회 간 『서귀포문학』 2023년 제35호에서
*사진 : 탐라국의 해저(서귀포 앞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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