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청산에 살으리랏다

김창집 2005. 7. 5. 00:30

--- 논고악에서 보리악까지(2005. 7. 3.)

 


 

* 제일 처음 만난 실꽃풀의 모습

 

▲ 마른 장마 지역을 탈출하며

 

 금년의 장마는 제주도민들에게는 최악이다. 아무리 물난리 나는 것보다 낫다고는 하지만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농작물이 타들어 가고 매일 밤 이어지는 열대야는 사람의 정체를 차리지 못하도록 한다. 만사가 귀찮고 일하고 싶은 의욕도 떨어진다. 돌아다니다 보면 가뭄 때문에 말라죽는 나무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언제 이런 곳을 탈출하여 잠시라도 지친 심신을 달래고 정신 차리고 돌아와야겠다는 계획 아래 지난주에 가지 못한 논고악에 가기로 하고는 며칠을 버텼다. 그런데 토요일 오후 5시에 시골에 조문 갔다가 초등학교 동창생 셋이서 규합하여 먹고 마시다가 할머니집에서 국수와 소주 1병으로 마감하고 돌아온 것이 1시 25분. 어머님을 보살펴 드리고 곧장 잠으로 빠져들었다. 

 


 

* 숲에서 계속 만났던 산꿩의다리

 

 아침에 일찍 눈은 떴으나 일어나지 않고 미적거리다 배추된장국을 끓였는데, 어머님 식사를 해결하다 보니 벌써 안 온다고 전화가 왔다. 아직까지 빈속에 산행 나서본 적은 없는데, 시간이 없어 부랴부랴 나가 시간 내에 겨우 골인했으나 신을 신으며 모자와 카메라를 두고 가서 출발 후 다시 들러야 했다. 되는 대로 배낭에 주워놓은 것은 참외 몇 개와, 마트에 갔다가 사온 삼다수 큰 병 얼린 것 하나.

 

 산천단을 벗어나면서부터 공기가 달라졌다. 하나도 지친 기색이 없는 새파란 나뭇잎이 눈앞에 펼쳐져 싱그럽기 그지없다. 마른 장마 동안 그래도 한라산에는 몇 차례에 걸쳐 비가 내렸기 때문에 나무들이 더욱 싱싱하고 촉촉이 젖은 땅에서 올라오는 기운이 차창 안으로 흘러 들어와 메말랐던 가슴을 어루만져 준다. 인간이란 생명체는 물 속에서 생겼다는데, 물기가 있음으로서 생기를 띠는 것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닐까?

 


 

* 담쟁이, 때죽나무, 굴거리 등 푸른 숲

 

△ 남쪽 코스로 정상 도착

 

 제1횡단도로 숲 터널을 지나 논고교 부근에서 차에서 내려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싱그러운 숲 특유의 내음이 몸을 감싸기 시작하여 얼마 안가 몸 구석구석을 적시면서 충전되기 시작한다. 우리를 기다리던 인디카(iNdica) 회원 6명이 합세하여 같이 걷는다. 모처럼 왔는데 좋은 들꽃을 만나 기쁘게 해주어야 할 텐데. 사실 한여름의 깊은 숲에는 특별한 난(蘭) 종류를 제외하면 꽃이 그리 흔치 않다. 20여분 걸었을까? 내를 건너기 전에 조금 쉬는 시간을 가졌는데, 호자덩굴꽃 한 쌍과 실꽃풀이 여럿 보인다.


 하얗고 가느다란 실꽃풀은 내 카메라론 접사가 잘 안 된다. 가늘고 앙증맞은 실꽃풀은 산꿩의 다리와 함께 숲길을 걷는 동안 계속 나타나 우리와 벗해 주었다. 서어나무가 열매 줄기를 기다랗게 늘어뜨리고 서있는 모습 또한 이채롭다. 저 나무는 이 숲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나무인데 참나무와 함께 표고 숙주목으로 쓰인다. 



 

* 향신료로 쓰이는 초피(죄피)나무와 열매

 

 일제강점기 때 시작된 이곳의 표고 재배는 해방후 무분별한 참나무 채취로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 도내에 남아 있는 표고 재배장은 소단위가 될 수밖에 없고 상당수가 중국에서 수입한 참나무를 이용해 표고 재배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아침을 굶고 왔다니까 이쪽 저쪽에서 떡을 내놓는다. 하긴 늦도록 술을 마시고 아침에 참외 하나 으적으적 깨물어 먹었더니 그렇게 배고픈 감은 없다. 


 다시 출발하여 조금 더 올라가다가 건너기 쉬운 곳으로 조그만 계곡을 지나간다. 비가 내린 뒤여서 가끔씩 이름 모를 버섯이 출현하여 꽃 대신 우리 눈을 즐겁게 한다. 아주 가파른 곳을 올라가느라 힘이 부치는 듯한 분들이 있어 비탈에서 한 번 더 쉬고 바람도 통하지 않은 곳을 20분 정도 허비하여 정상에 도착했다. 동쪽 능선으로만 오르다가 처음으로 가보는 코스다.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기다리는데 바람이 다시 불어와 땀을 식혀준다.  

 


 

* 표고 재배용 못 속에 비친 숲

 

▲ 이국의 정원 같은 굼부리

 

 모두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능선을 돌아 성판악이 보이는 북쪽 정상으로 출발했다. 둘레가 2,789m라는 수치가 말해주듯 논고악은 능선이 긴 원형 굼부리를 가진 오름이나 동쪽으로는 아주 낮아 U자형 굼부리처럼 느껴진다. 능선 길을 돌아 어느덧 북동쪽 봉우리에 도착하니, 눈앞에 성널오름이 우뚝 솟아 있다. 안개 때문에 희미하기는 하나 널빤지 같은 돌이 성처럼 길게 박혀 있어 성널오름이란 이름이 생겼고, 한자의 뜻을 빌어 성판악으로 표기한다. 

 

 굼부리에서 쉬기로 하고 다시 동쪽으로 돌아 내려간다는 것이 조금 지나쳐 다시 돌아와 보니 저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벌써 다 와 있다. 내려오다가 들개에게 습격 당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노루가 끔찍하게 다리를 잘려 죽은 상태로 있어 너무도 참혹했다란 말을 한다. 내가 항상 동쪽으로 들어올 때는 이 굼부리에서 자기 구역을 침범하는데 대해 항의라도 하듯이 묘한 톤으로 컹컹 짓는 노루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데….        

 


 

* 논고악 정상에서 본 성널오름

 

 아늑한 굼부리에 앉아 새참을 먹었다. 나무가 가득하여 좁은 느낌이나 독특한 나무의 생김새와 지형의 특이성으로 하여 꼭 이국의 정원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비가 많이 올 때 물이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지 어떤 나무는 뿌리가 위로 드러나 있다가 다시 순이 돋아 위로 솟기도 하는 등 특이한 형태의 나무들이 보인다. 가새뽕나무도 여러 개 보이고 참빗살나무가 있으나 조금 위로는 서어나무나 때죽나무들이 많다.

 

 의논 끝에 처음 계획했던 대로 바로 보리악으로 가기로 하고 2만 5천 분의 1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 길 안내 내비게이션폰(navigation phone)에 입력하고 나서 천천히 출발했다. 처음 가보는 코스라 폰에 의존하면서 자주 지도를 꺼내 확인한다. 숲이 아니라 오름이 보이는 곳이라면 쉽게 가겠지만 전혀 볼 수 없는 숲이어서 이런 경우에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가는 도중에 표고밭 관리사 터를 지나게 되어 주변을 구경했다.

 


 

* 산행 도중에 만난 호자덩굴 열매

 

△ 못 들른 보리악 계곡

 

 가는 도중에 1m 정도의 폭으로 쭉 깔아놓은 옛날 제주시와 서귀포를 연결했던 도로도 발견하였고, 조선시대 국립목장의 경계였던 상잣성도 보았다. 옛날 사람들의 등짐과 괭이와 곡괭이 정도를 가지고 이곳에다 이렇게 작업하느라 고생께나 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일제시대 자동차 길을 빼고 표고 재배장 시설을 만든 것은 진일보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더욱이 곳곳에 시멘트도 쓰지 않고 표고 재배목을 담그는 못을 만들어 지금도 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면 재주가 놀랍다.

 

 숲이 너무 우거져 어두컴컴한 가운데 가끔씩 나타나는 산수국은 우리의 길잡이이자 숲을 밝혀주는 등불 같다. 처음 피어날 때의 중성화는 옅은 초록빛을 띄었다가 활짝 피면서 흰색, 그리고 색이 바래어가면서 보랏빛을 띠는 등 변화가 심해 지방에서는 도채비꽃이라고도 불린다. 1시간 정도 걸었을까 오름 정상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가 늘 가는 코스의 정상이 아니라 길쭉한 가운데 봉우리였다.



 

* 꽃이 핀지 일주일쯤 된 산수국 중성화의 색 변화

 

 아마도 내비게이션폰에 입력해놓은 기본 자료가 착오가 있었는지 방향이 조금 빗나가 벌써 저쪽에 지나쳐버린 주봉이 보인다. 시간은 오후 1시 반. 일행 중에는 아침에 석굴암에 다녀오다가 밥도 안 먹고 합류한 사람도 있고, 또 11시20분이면 어김없이 식사하는 사람이 있어서, 여기서 다시 올라가 계곡을 다녀온다는 것이 무리일 것 같아 바로 동쪽으로 나가 서귀포 가서 식사하기로 하였다.


 언제나 미련은 남는 법, 이런 때는 다음에 다시 한 번 오라는 뜻으로 알고 무리를 않은 것이 좋다. 아예 나침반을 꺼내들고 20분 정도 앞장서 걸어 도로로 나왔다. 모두 무사히 귀환한 시간이 5분전 2시. 영천에 맛좋은 자리물회가 있다고 해서 갔으나, 오늘은 재료가 떨어졌다 하므로 이왕 물회 먹기로 한 것 보목리로 가자고 해 보목리 끝집 어진이네 횟집에서 맛있는 자리물회를 먹고 나니, 시간이 얼마 안 남아 그냥 제주시로 넘어왔다. 4시. 

 


 

* 5.16도로에서 만난 풀고사리류 

 

♬ L"amour, C"est pour rien (사랑은 이유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