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일부터 격주로 발행되는 <제주시정소식>지에 40회에 걸쳐 연재될 글을 발표 되는 대로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제주시청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652-6호 <탐라순력도>는 꼭 300년 전인 1702년 제주 목사 이형상이 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로 제주도를 순력하면서 김남길 화공으로 하여금 그리게 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지금에 와서 제주의 옛 모습과 당시의 여러 가지 사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화북성조'는 화북포구를 지키는 군 진영에 가서 여러 가지 상태를 점검하는 그림입니다.
▲ <제민일보> 2002년 7월 4일자에 소개된 글
-- "신탐라순력도", <제주시정>에 연재---
1702년 이형상 목사가 제주를 순력하는 장면을 그린 <탐라순력도>를 따라 제주상고 교사 김창집씨(탐라문화보존회 이사)와 화가 강부언 씨가 기행길에 올랐다. '6·13 지방선거'로 지난해 12월 1일자로 잠정 휴간했던 <열린 제주시정소식>이 7월 2일자로 속간(121호)하면서, 「신탐라순력도」기획 연재를 시작했다. 매달 두 차례 연재되는 <신탐라순력도>는 '화북성조(禾北城操)'를 시작으로 이형상 목사가 순례했던 길을 따라 감칠맛 나는 김창집 씨의 글과 시원하고 활달한 강부언 씨 그림이 보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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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 탐라순력도 <1> 화북성조(禾北城操)
1702년 제주목사로 도임한 이형상(李衡祥) 선생은 당시 목사 자격으로 관내를 순시하면서 그 즈음의 상황을 화공 김남길(金南吉)의 그림 화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로 남겼다. 생성 배경이 이와 같은 탐라순력도를 따라 3세기가 지난 지금, 평범한 시민의 시각으로 오늘의 현지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려 '新 탐라순력도'를 기획 연재한다.
新 탐라순력도는 탐라순력도 이후 정확히 300년만의 기록이란 점에서 그 의의는 한층 더 크다 할 것이다. 탐라순력도가 300년 전의 기록으로 오늘에 높이 평가받음과 같이, 新 탐라순력도는 앞으로 100년, 300년 후 우리 후손에게 평가받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림과 글을 각각 맡아주신 본도 출신 강부언 화백과 사단법인 탐라문화보존회 이사 김창집 선생께 고마움을 표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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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순력도 그림 중 '화북성조'
▲ 풍화작용이 날려버린 선정비의 치적들
<탐라순력도>가 아니었으면 300년 저쪽 일을 더듬는 일을 어찌 쉽게 시작할 수 있었으랴? 오늘 이렇게 헤매지 않고도 옛 모습을 찾아 떠날 수 있음은 순전히 병와 이형상(甁窩李衡祥) 목사와 화공 김남길(金南吉)의 공이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 어떻게 이렇게 행사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그림과 글로 남길 생각을 했는지? 이는 오늘날 우리가 편한 것만 찾고 모든 것을 대충대충 넘겨버리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에 철퇴를 내린다. 기록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순력이 시작된 날은 그가 목사로 부임한 해인 1702년 음력 10월 29일의 일이다. 물론 그 이전에 있었던 승보시사(陞補詩士)나 공마봉진(貢馬封進), 성산관일(城山觀日), 교래대렵(橋來大獵) 같은 행사도 그림으로 남기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순력에 나선 것은 양력으로 따져 12월 17일 추운 겨울 아침이었다. 이곳 화북성에서 점심을 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는 것은 짐작이 가지만 순력 일행이 언제 출발했고 시간은 얼마나 걸렸는지, 오늘 강부언 화백의 무쏘를 타고 가면서 너무 궁금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화북동의 근간이 되는 별도리(別刀里)는 당시 목관아지 동쪽 10리에 세 부분으로 된 포구를 안고 있는 인구 450명 정도의 조그만 마을이었다. 그림을 보면, 마을은 포구만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화북성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오현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옛날 목사 일행이 지나갔을 법한 비스듬한 길을 따라 가다가 제주도 기념물 제30호 화북비석거리에서 차를 멈추었다. 귀양오듯 부임하는 관원들이 섬에 무사히 도착하여 이곳을 지나며 '나도 열심히 해서 저런 거 하나 남기고 가야지.' 하는 생각을 했겠지.
* 화북 마을 입구 비석거리의 비석들
비석을 살펴보는데, 70세 전후의 아저씨가 다가와 남쪽으로 보이는 저 별도천의 교각(橋脚)이 잘못되어 큰 내가 터지는 날이면 비석 앞에 있는 낮은 밭 일대가 침수가 된다고 하소연한다. 민원 사항인데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혹 선정을 베풀었던 이 비의 목민관이 살아온다면 해결해줄 수 있었을까? 세 번이나 옮겨 이곳에 자리했다는데 이제는 제주의 관문이 아니어서 빛이 바랜다. 저 분들은 진짜 선정을 베풀기는 한 걸까? 풍화작용은 매정하게도 그 치적 내용을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 어업 전진기지로 바뀐 옛 제주의 관문
갯내음이 훅 풍기는 포구 선착장에 도착하여 그림을 펼쳐놓고 사방을 둘러본다. 제주시의 넘쳐나는 주택난은 이곳까지 아파트가 들어서게 만들었다. 얼추 눈에 띄는 것만 봐도 별도봉 쪽으로 초원맨션, 금산맨션, 한라산 쪽으로 동아아파트, 화신빌라…. 앞으로 횟집들도 들어섰다. 눈에 띄는 옛 건물은 바로 앞에 자리잡은 기와집, 지방기념물 제22호 해신사(海神祠)다. 안내문에 따르면 1975년 이곳 포구와 선착장을 정리하면서 협소한 장소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는데, 순조 20년(1820) 한상묵 목사에 의해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할 목적으로 지었다고 한다.
들어가 보니, 전면 1칸 오량집 팔작지붕 아래 다시 비각을 세워 조그맣게 '해신지위(海神之位)'란 빗돌을 감싸고 있다. 매년 정월 보름과 선박이 출항하기 전 이곳에서 해신제를 지내 해상안전을 기원하였으나, 10여 년 전부터는 마을의 안녕과 수복을 기원하는 유교식 마을제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저 순력도에 나오는 비각(碑閣)은 무엇인지? 이곳이 육지로 통하는 관문인데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어떤 형태의 사당이 그 이전에도 있지 않았을까? 연대로 보아 별도포구를 만드는 데 힘쓴 선정관 김정 목사의 공적비도 아닐 테고.
* 화북 포구에 있는 해신당의 모습
세 부분으로 나뉘었던 포구는 안쪽 포구 부분이 매립되어 민가가 들어섰는데, 돌로 빽빽하게 쌓아올린 울타리가 인상적이다. 그쪽으로 돌아가다가 움푹 들어간 곳의 물통에서 빨래하는 중년 여인을 만났다. 물 이름이 비석물이라 하나 그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이 부근 지명인 금돈지의 이름을 딴 횟집이 있어 수족관을 들여다보니, 붕장어, 쥐치, 보리멸 등 이곳에서 잡히는 물고기가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천연 요새로 여러 척의 연락선과 전함 판옥선을 매놓았던 옛 포구의 모습은 조금 허물어져, 과거에 있었던 부분과 근래에 밖으로 새로 쌓은 방파제의 이중 구조가 돼버렸다. 포구에는 고기잡이배들만 매어져 있어 이제는 육지로 드나드는 관문이 아닌 어업 전진기지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복성호, 한일호, 시온호, 금선호, 영덕호, 동진호, 유성호, 영진호….
▲ 고증이 반드시 필요한 유적 복원
1678년(숙종 4년) 제주목사 최관(崔寬)이 화북수전소를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는 화북진성은 동쪽 민가의 울타리가 된 곳과 남쪽 도로에 면한 곳 이외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높이 10자에 둘레가 303보가 된다는 성을 돌아보니 곳곳에 담쟁이덩굴과 계요등 줄기가 엉키어 있고, 안으로 드문드문 멀구슬나무가 서 있다.
* 원형대로 남아 있는 부분의 화북진성
화북초등학교로 사용했던 성터는 북쪽으로 소나무 여덟 그루가 지키고 이어 오른쪽으로 이제야 벚나무를 심어놓았다. 탐라순력도 화북성조 그림을 보면 가운데 객사인 환풍정(喚風亭)을 중심으로, 막사나 무기고 같은 건물은 대부분 북쪽으로 몰려 있어 위로는 훈련장이나 집합 장소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남쪽은 길을 넓히며 성을 침식해버렸다.
이 날 목사와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를 겸했던 이형상 목사는 제주판관 이태현(李泰顯)과 군관 이정진(李鼎鎭) 등 네 사람을 대동하고 이곳 조방장(助防將) 이희지(李喜枝)가 관장하는 172명의 성정군(城丁軍)을 사열하고 군기(軍器)와 집물(什物)을 점검한다. 그러나 오늘 이 성터에는 왼쪽에 농구대 하나가 우뚝 서서 목사의 위용을 짐작하게 하고, 서쪽으로 게이트볼장으로 보이는 시설이 들어섰다. 동쪽에는 2층의 '화북 청소년 문화의 집'을 새로 지어, 미술, 컴퓨터, 오락, 취미 활동 등 저소득층 어린이들을 위해 방과후 교실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림에 나와 있는 동쪽 바닷가의 별도연대(別刀煙臺)는 작년에 복원했다는데 그 꼴이 말이 아니다. 고증도 없이 아예 쉼터까지 만들어 이어놓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냥 두는 것이 났지 않았을까? 어이없어 눈을 돌렸는데, 바다 물 속을 열심히 드나들며 작업하는 해녀들이 보인다. 그 날 목사 일행의 한끼 점심 식사를 위하여 이들을 한겨울 물 속으로 내몰지나 않았었는지? <2002.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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