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
복수초꽃을 만나러 절물오름 옆 민오름으로 가는 오름 식구들을 배웅하고 서둘러 신당 기행 출발지인 교육박물관으로 갔다. 오름 식구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내가 꼭 돌아보고 싶은 곳이고, 또 그곳에 가서 신목(神木)과 신당 주변에 있는 식물들을 소개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굿과 당을 연구하며 오늘 인솔을 맡은 문무병 시인이 소장으로 있는 제주전통문화연구소에서 역점 사업으로 실시하고 있는 신당 기행은 이번이 다섯 번째로, 꼭 한번 행사가 겹쳐 가지 못했는데 참가자들이 퍽 섭섭해했다는 후문이고 보면 거절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나를 반긴 사람은 소설가 이석범 선생이었다. 한때 서울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갈라의 분필'과 '윈터 스쿨' 등을 써서 상상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이 선생은 지금 고향에 돌아와 모여중 교사로 복직해 근무중이다. 다음에 만난 분은 고찬화 선생님이다.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언제나 정정하신 나의 펜이다. 그렇게 제주를 사랑하시는 선생님도 드물다. 전공 분야가 아님에도 국내외에 흩어진 제주도 관련 문헌을 샅샅이 뒤져 방대한 '탐라사 자료집' 2권을 내셨다. 제주도 관련 사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뛰어다니며 '중국정사·일본서기·삼국사·고려사·조선왕조실록·증보문헌비고' 등을 수집·번역하여 원문과 함께 사비(私費)로 편찬하셨다.
이어 문무병 선생과 같이 나타난 사람은 이외로 민속학자 주강현 선생이었다. '마을로 간 미륵' 시리즈를 냈으며, 요즘 교육방송에서 '배꼽 문화' 같은 구수한 민속학 강의로 이름을 날리고, 북한 민속 관련 프로에 단골로 넘나드는 주 선생은 어제 제주대학 평생교육원 강의를 마치고 저녁을 먹다가 소설가 현기영 선생을 만나 통음을 했다는 얘기다. 그 이외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많아 오늘 여행이 재미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행사는 늘 제주케이블 TV에서도 취재 방송하고 있다.
먼저 찾은 곳은 오라 본향당인 내왓당이다. 공설운동장 서쪽 다리를 지난 곳에 차를 세우고 경작하지 않은 오른쪽 밭으로 들어서는 순간, 지천으로 피어 있는 개불알풀꽃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간간이 짙은 보랏빛 광대나물꽃이 피어있고, 냉이꽃은 벌써 시들어간다. 개별꽃도 하나둘 벙글고 완두콩 하얀꽃이 유난히 눈길을 끌고 있다. 옆 보리밭도 제법 풍성해져 부는 바람에 출렁이기 시작한다.
▲ 신당(神堂)이란 무엇인가
신당은 신이 머무는 곳이며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다. 신과 관련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의 안녕(安寧)을 축수(祝手)하고 가정의 복락(福樂)을 기원하며 자식의 병을 고쳐 달라고 찾아가는 장소다. 이러한 신당의 형태는 그 위치와 관련이 깊다. 신당의 지명들은 당의 위치한 지형과 지세에 따라 붙여진 것이며 당신(堂神)들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부정한 신은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이 당을 비밀한 장소에 감추어두고 몰래 찾아다니는 경향이 있고, 농경신이나 본향당신처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다니는 당은 개방적인 장소에 존재한다.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죄목 때문에 부부신이 별거하여 하늬바람이 부는 쪽과 마파람이 부는 쪽으로 떨어져 좌정(坐定)하여 웃당과 알당 또는 동당과 서당으로 하르방당과 할망당이 나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또 신당은 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지형적 조건에 따라 해변(海邊) 존재형, 천변(川邊) 존재형, 답간(畓間) 존재형, 수림(樹林) 내재형, 동산형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신당은 신의 집으로 인간이 꾸민 제의(祭儀)의 장소다. 신당은 신이 깃드는 곳에서 신이 머무는 곳으로 그 다음에는 신을 모시고 제물을 차려 굿을 하는 장소로 변모해 왔다. 그러므로 신당의 최초의 형태는 나무나 바위, 또는 굴이었고 여럿이 모일 수 있는 마당이 있는 곳이었으며, 나중에는 울타리를 두르고 제단을 만들어 당집을 짓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당의 구조는 신의 신체(神體, 신이 깃드는 곳)를 중심으로 신목형(神木型), 신혈형(神穴型), 신석형(神石型), 석원형(石垣型), 당우형(堂宇型), 복합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외에도 당나무에 걸려 있는 것으로 지전물색형(紙錢物色型), 명실형(命絲型)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물색은 신에게 바치는 폐백(幣帛)으로 고운 옷감을 뜻하며, 명실은 명을 이어주는 것이므로 물색이나 명실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여신의 성격과 기능을 알 수 있다. 제주시 지역의 신당은 신의 성격에 따라 천신계(天神系), 산신계(山神系), 농경신계(農耕神系), 치병신계(治病神系), 산육신계(産育神系), 해신계(海神系)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부분의 당에는 부부신을 중심으로 모든 신이 한 곳에 모여 있는 형태이다. <이상은 '신당 기행 자료집'에서 뽑음>
△ 오라동 본향당과 정실 본향당에서 본 것들
오라동 본향 내왓당의 당신(堂神)은 '남새 할망 송씨 부인 일뤠중저'라 했다. 본래 이곳은 농경신(農耕神)을 모시는 알당 할망당이고, 산신(山神)을 모시는 웃당 하르방당은 내 동쪽에 있었는데, 공설운동장을 만들면서 없애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이곳에다 두 신위(神位)를 모시고 있다. 없어진 하르방당에는 큰 구렁이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운동장을 만들면서 죽여버렸기 때문에 전도체전 행사 때마다 비가 내려 그 비를 '도체비'라 이름하며 웃기도 한다.
당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고 가운데에는 100세는 훨씬 넘어 보이는 커다란 팽나무가 버티고 있다. 제단은 두 곳에 꾸며져 있었으며 최근에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으로 당유자를 비롯한 과일이 싱싱한 채로 옆에 버려졌다. 팽나무는 제주어로 '폭낭'이라 불려지는 느릅나무과의 낙엽교목이다. 제주도 토양과 기후에 꼭 들어맞기 때문에 설촌(設村)할 때는 마을 중심이 되는 곳과 신당에다 이 나무를 심는다. 해수의 영향을 받지 않고 병충해가 없이 잘 자라기 때문에 오래된 마을에 가보면 고목이 있어 마을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역할도 한다. 물론 제주도 신당의 신목은 대부분 팽나무다. 이곳 팽나무의 한 줄기에는 송악이 감겨 올라 싱싱한 잎을 자랑하고 있다. 요즘 마을길을 넓히노라 오래된 팽나무들을 마구 잘라버려 아쉬운 감을 지울 수 없다.
정실 마을 중간쯤 되는 곳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어 다리를 건너니 왼쪽 냇가를 따라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바위 위에다 고인돌 모양 밑돌 네 개를 괴고 위에 큰 바위를 올려놓은 것이 보인다.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 놓아서 후세 사람들이 혼동하기 십상이겠다. 신당 못 미처 조그만 샘이 있어 물이 흐른다. 이곳이 마을 이름 '정실(井實)'의 근간이 되는 우물인가 보다. 우물 속에는 도롱뇽 알이 긴 대롱 같은 알주머니 속에서 부화되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원래 이 우물은 정수암(井水岩)이라 했는데, 조선 선조 20년에 목사가 '영구춘화(瀛丘春花)'를 보러 '들렁괴'로 가다가 이곳 주변 경관을 보고 '연꽃잎에 고인 구슬 같은 샘'이라 이름 붙인 뒤부터는 '옥련천(玉蓮泉)'이라 했으며, 마을의 식수로 사용해 왔다.
새롭게 단장하여 넓혀놓은 정실 본향당 도노미당은 본향당신 두 자리를 모셨는데 할망은 산육신(産育神)으로 '조숫돌 삼대바지(지명) 삼신불법 할마님또'이고, 하르방은 '김씨 영감 산신대왕 통정대부'이다. 이곳은 바위그늘 아래 굴이 패여 있어 그 안에다 제단을 꾸몄다. 옆 언덕 위 대나무 속에 큰 팽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절벽 아래로는 조록나무들이 길게 늘어져 있다. 모람나무와 돈나무, 섬쥐똥나무도 섞였고, 새로 조경하면서 비자나무와 후박나무를 심어 놓았다.
▲ 가는 곳마다 신령스럽고 아늑한 성소(聖所)가
오등동의 고다싯당은 길을 넓히면서 너무 나앉은 느낌이 들었으나 팽나무 신목에 걸려 있는 지전물색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전(紙錢)은 백지를 접어 구멍을 뚫은 것으로 저승에서 쓰는 돈이고, 물색(物色)은 삼색의 천으로 신의 옷을 지을 옷감이다. 또 그냥 백지와 실을 걸어 놓기도 하는데 백지는 자신이 기원할 사연이 담긴 것이고, 실은 명실이라 하며 오래 살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어렸을 적 백지를 걷어다 연을 만들고, 실을 가져다 연줄로 사용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곳은 4·3 때문에 폐허가 되어 아래 동네로 소개(疏開)해 내려간 마을 사람들이 1년에 한번 찾아와 과세문안을 드리며 복과 명을 비는 곳이다.
월평 다라쿳 본당은 우리 학교 정문 앞이어서 내가 가끔 찾아가는 곳이다. 언덕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이 당은 근래 들어 깨끗하게 정비해 놓아서 운치가 덜하나 위치가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그런 대로 불만은 없다. 이곳에는 마을 보호수로 지정된 200년이 넘은 팽나무가 자리잡고 있는데 지전물색이 걸려있는 신목은 예덕나무고 그 옆에 천선과나무가 두 그루가 아직도 열매를 매단 채 서 있다. 이 당은 아기가 아파서 낫게 해달라 빌고 갈 때는 그릇을 깨고 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 때문에 이 당을 정리하기 전에는 깨진 사기그릇이 수북히 쌓여 있어 혹시 그 속에 도자기(陶瓷器)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모두 치워버리고 청자 파편으로 보이는 것 몇 개만 제단 옆 바위 틈새에 끼워 놓았다.
용강 웃무드내 본향당은 마을에서 많이 떨어진 냇가에 위치해 있었다. 밤에 주로 가서 제를 올리기 때문에 철물로 새롭게 계단 구조물을 만들어 놓았다. 제단은 바위굴로 되어있으며 위에는 마을에서 보호수로 지정해 놓은 200년이 넘은 구실잣밤나무가 콩짜개덩굴을 잔뜩 매단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이 당은 옥황상제의 막내딸을 모시고 있는 특이한 경우다. 하늘의 신이 인간 세계에 귀양을 와서 인간을 수호하는 본향당 신이 된 얘기는 제주시내 오등동이나 해안동의 대별왕 소별왕 본풀이가 있다. 곡식 낟알을 까먹은 죄로 귀양 정배된 옥황상제의 7공주 중 막내딸은 한라산으로 내려와 사라오름-물장오리-거친오름-형제봉으로 해서 가시덤불을 헤치며 내려오다 보니, 머리가 헝클어지고 형색이 말이 아니었다. 건지동산에 와서 건지를 틀고 용강리 궤당 근처에 있는 정좌동산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고 좌정처를 궤당으로 정했다는 애달픈 사연이 본풀이 내용이다.
내가 세 번이나 찾아가면서도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은 동회천 마을 제단인 오석불이다. 회천동 화천사 경내에는 다섯 개의 석불과 그 신들을 보좌하는 산신과 요왕(龍王) 등 일곱 개의 자연석불이 모셔져 있다. 특히 이곳에 와서 이 불상에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속설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그 때문에 절이 지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절 바깥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이 있어 이 마을이 설촌 되기에 이르렀고 마을 이름인 회천(回泉)이 생긴 것이다. 나무가 우거져 있어 경관도 수려하다.
오석불(五石佛)은 상반신이 좌상(坐像)으로 보이는 신상(神像)들이며 크기는 85㎝ 정도, 좌우에 있는 산신상과 요왕상은 그보다 좀 작다. 이곳 동회천에서는 마을제를 지내는 대신 이곳에서 석불제를 지낸다.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제를 지내는데 제관 이외에는 아무도 참석할 수 없다. 제물로 돼지를 쓰지 않으며 불교적 색채가 짙다. 석불제를 지내면 무병·포태·득남의 효험이 있다고 하며 호열자가 창궐할 때도 이 마을은 무사했다고 한다. 특히, 석불제를 지낼 때는 이 석상에다 송낙(고깔)을 씌우고 종이옷을 해 입히고 실로 허리를 맨다는 점이다.
이 밖에 봉개 서회천 본향당과 동회천 본향 새미하르산당, 도련1동 도련드르 일뤠당, 화북동 본향 가릿당, 화북동 윤동지 영감당을 둘러보며, 문무병 시인의 구수한 해설과 민속학자 주강현 선생의 걸쭉한 강의가 곁들여진 좋은 하루였다. 외래의 강력한 종교가 들어오고, 하루가 다르게 개발되는 도시의 외곽지이지만 아직도 이런 성소(聖所)가 남아 숨쉰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앞으로 잘 보전하는 방향을 서둘러 마련해야겠다.
복수초꽃을 만나러 절물오름 옆 민오름으로 가는 오름 식구들을 배웅하고 서둘러 신당 기행 출발지인 교육박물관으로 갔다. 오름 식구들에게는 미안했지만 내가 꼭 돌아보고 싶은 곳이고, 또 그곳에 가서 신목(神木)과 신당 주변에 있는 식물들을 소개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굿과 당을 연구하며 오늘 인솔을 맡은 문무병 시인이 소장으로 있는 제주전통문화연구소에서 역점 사업으로 실시하고 있는 신당 기행은 이번이 다섯 번째로, 꼭 한번 행사가 겹쳐 가지 못했는데 참가자들이 퍽 섭섭해했다는 후문이고 보면 거절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나를 반긴 사람은 소설가 이석범 선생이었다. 한때 서울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갈라의 분필'과 '윈터 스쿨' 등을 써서 상상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이 선생은 지금 고향에 돌아와 모여중 교사로 복직해 근무중이다. 다음에 만난 분은 고찬화 선생님이다. 고희(古稀)를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언제나 정정하신 나의 펜이다. 그렇게 제주를 사랑하시는 선생님도 드물다. 전공 분야가 아님에도 국내외에 흩어진 제주도 관련 문헌을 샅샅이 뒤져 방대한 '탐라사 자료집' 2권을 내셨다. 제주도 관련 사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뛰어다니며 '중국정사·일본서기·삼국사·고려사·조선왕조실록·증보문헌비고' 등을 수집·번역하여 원문과 함께 사비(私費)로 편찬하셨다.
이어 문무병 선생과 같이 나타난 사람은 이외로 민속학자 주강현 선생이었다. '마을로 간 미륵' 시리즈를 냈으며, 요즘 교육방송에서 '배꼽 문화' 같은 구수한 민속학 강의로 이름을 날리고, 북한 민속 관련 프로에 단골로 넘나드는 주 선생은 어제 제주대학 평생교육원 강의를 마치고 저녁을 먹다가 소설가 현기영 선생을 만나 통음을 했다는 얘기다. 그 이외에도 낯익은 얼굴들이 많아 오늘 여행이 재미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행사는 늘 제주케이블 TV에서도 취재 방송하고 있다.
먼저 찾은 곳은 오라 본향당인 내왓당이다. 공설운동장 서쪽 다리를 지난 곳에 차를 세우고 경작하지 않은 오른쪽 밭으로 들어서는 순간, 지천으로 피어 있는 개불알풀꽃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간간이 짙은 보랏빛 광대나물꽃이 피어있고, 냉이꽃은 벌써 시들어간다. 개별꽃도 하나둘 벙글고 완두콩 하얀꽃이 유난히 눈길을 끌고 있다. 옆 보리밭도 제법 풍성해져 부는 바람에 출렁이기 시작한다.
▲ 신당(神堂)이란 무엇인가
신당은 신이 머무는 곳이며 신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다. 신과 관련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마을의 안녕(安寧)을 축수(祝手)하고 가정의 복락(福樂)을 기원하며 자식의 병을 고쳐 달라고 찾아가는 장소다. 이러한 신당의 형태는 그 위치와 관련이 깊다. 신당의 지명들은 당의 위치한 지형과 지세에 따라 붙여진 것이며 당신(堂神)들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부정한 신은 그 신을 믿는 사람들이 당을 비밀한 장소에 감추어두고 몰래 찾아다니는 경향이 있고, 농경신이나 본향당신처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다니는 당은 개방적인 장소에 존재한다.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죄목 때문에 부부신이 별거하여 하늬바람이 부는 쪽과 마파람이 부는 쪽으로 떨어져 좌정(坐定)하여 웃당과 알당 또는 동당과 서당으로 하르방당과 할망당이 나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또 신당은 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지형적 조건에 따라 해변(海邊) 존재형, 천변(川邊) 존재형, 답간(畓間) 존재형, 수림(樹林) 내재형, 동산형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신당은 신의 집으로 인간이 꾸민 제의(祭儀)의 장소다. 신당은 신이 깃드는 곳에서 신이 머무는 곳으로 그 다음에는 신을 모시고 제물을 차려 굿을 하는 장소로 변모해 왔다. 그러므로 신당의 최초의 형태는 나무나 바위, 또는 굴이었고 여럿이 모일 수 있는 마당이 있는 곳이었으며, 나중에는 울타리를 두르고 제단을 만들어 당집을 짓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당의 구조는 신의 신체(神體, 신이 깃드는 곳)를 중심으로 신목형(神木型), 신혈형(神穴型), 신석형(神石型), 석원형(石垣型), 당우형(堂宇型), 복합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외에도 당나무에 걸려 있는 것으로 지전물색형(紙錢物色型), 명실형(命絲型)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물색은 신에게 바치는 폐백(幣帛)으로 고운 옷감을 뜻하며, 명실은 명을 이어주는 것이므로 물색이나 명실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여신의 성격과 기능을 알 수 있다. 제주시 지역의 신당은 신의 성격에 따라 천신계(天神系), 산신계(山神系), 농경신계(農耕神系), 치병신계(治病神系), 산육신계(産育神系), 해신계(海神系)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부분의 당에는 부부신을 중심으로 모든 신이 한 곳에 모여 있는 형태이다. <이상은 '신당 기행 자료집'에서 뽑음>
△ 오라동 본향당과 정실 본향당에서 본 것들
오라동 본향 내왓당의 당신(堂神)은 '남새 할망 송씨 부인 일뤠중저'라 했다. 본래 이곳은 농경신(農耕神)을 모시는 알당 할망당이고, 산신(山神)을 모시는 웃당 하르방당은 내 동쪽에 있었는데, 공설운동장을 만들면서 없애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이곳에다 두 신위(神位)를 모시고 있다. 없어진 하르방당에는 큰 구렁이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운동장을 만들면서 죽여버렸기 때문에 전도체전 행사 때마다 비가 내려 그 비를 '도체비'라 이름하며 웃기도 한다.
당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고 가운데에는 100세는 훨씬 넘어 보이는 커다란 팽나무가 버티고 있다. 제단은 두 곳에 꾸며져 있었으며 최근에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으로 당유자를 비롯한 과일이 싱싱한 채로 옆에 버려졌다. 팽나무는 제주어로 '폭낭'이라 불려지는 느릅나무과의 낙엽교목이다. 제주도 토양과 기후에 꼭 들어맞기 때문에 설촌(設村)할 때는 마을 중심이 되는 곳과 신당에다 이 나무를 심는다. 해수의 영향을 받지 않고 병충해가 없이 잘 자라기 때문에 오래된 마을에 가보면 고목이 있어 마을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역할도 한다. 물론 제주도 신당의 신목은 대부분 팽나무다. 이곳 팽나무의 한 줄기에는 송악이 감겨 올라 싱싱한 잎을 자랑하고 있다. 요즘 마을길을 넓히노라 오래된 팽나무들을 마구 잘라버려 아쉬운 감을 지울 수 없다.
정실 마을 중간쯤 되는 곳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어 다리를 건너니 왼쪽 냇가를 따라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바위 위에다 고인돌 모양 밑돌 네 개를 괴고 위에 큰 바위를 올려놓은 것이 보인다.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 놓아서 후세 사람들이 혼동하기 십상이겠다. 신당 못 미처 조그만 샘이 있어 물이 흐른다. 이곳이 마을 이름 '정실(井實)'의 근간이 되는 우물인가 보다. 우물 속에는 도롱뇽 알이 긴 대롱 같은 알주머니 속에서 부화되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원래 이 우물은 정수암(井水岩)이라 했는데, 조선 선조 20년에 목사가 '영구춘화(瀛丘春花)'를 보러 '들렁괴'로 가다가 이곳 주변 경관을 보고 '연꽃잎에 고인 구슬 같은 샘'이라 이름 붙인 뒤부터는 '옥련천(玉蓮泉)'이라 했으며, 마을의 식수로 사용해 왔다.
새롭게 단장하여 넓혀놓은 정실 본향당 도노미당은 본향당신 두 자리를 모셨는데 할망은 산육신(産育神)으로 '조숫돌 삼대바지(지명) 삼신불법 할마님또'이고, 하르방은 '김씨 영감 산신대왕 통정대부'이다. 이곳은 바위그늘 아래 굴이 패여 있어 그 안에다 제단을 꾸몄다. 옆 언덕 위 대나무 속에 큰 팽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절벽 아래로는 조록나무들이 길게 늘어져 있다. 모람나무와 돈나무, 섬쥐똥나무도 섞였고, 새로 조경하면서 비자나무와 후박나무를 심어 놓았다.
▲ 가는 곳마다 신령스럽고 아늑한 성소(聖所)가
오등동의 고다싯당은 길을 넓히면서 너무 나앉은 느낌이 들었으나 팽나무 신목에 걸려 있는 지전물색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전(紙錢)은 백지를 접어 구멍을 뚫은 것으로 저승에서 쓰는 돈이고, 물색(物色)은 삼색의 천으로 신의 옷을 지을 옷감이다. 또 그냥 백지와 실을 걸어 놓기도 하는데 백지는 자신이 기원할 사연이 담긴 것이고, 실은 명실이라 하며 오래 살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어렸을 적 백지를 걷어다 연을 만들고, 실을 가져다 연줄로 사용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곳은 4·3 때문에 폐허가 되어 아래 동네로 소개(疏開)해 내려간 마을 사람들이 1년에 한번 찾아와 과세문안을 드리며 복과 명을 비는 곳이다.
월평 다라쿳 본당은 우리 학교 정문 앞이어서 내가 가끔 찾아가는 곳이다. 언덕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이 당은 근래 들어 깨끗하게 정비해 놓아서 운치가 덜하나 위치가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그런 대로 불만은 없다. 이곳에는 마을 보호수로 지정된 200년이 넘은 팽나무가 자리잡고 있는데 지전물색이 걸려있는 신목은 예덕나무고 그 옆에 천선과나무가 두 그루가 아직도 열매를 매단 채 서 있다. 이 당은 아기가 아파서 낫게 해달라 빌고 갈 때는 그릇을 깨고 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 때문에 이 당을 정리하기 전에는 깨진 사기그릇이 수북히 쌓여 있어 혹시 그 속에 도자기(陶瓷器)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모두 치워버리고 청자 파편으로 보이는 것 몇 개만 제단 옆 바위 틈새에 끼워 놓았다.
용강 웃무드내 본향당은 마을에서 많이 떨어진 냇가에 위치해 있었다. 밤에 주로 가서 제를 올리기 때문에 철물로 새롭게 계단 구조물을 만들어 놓았다. 제단은 바위굴로 되어있으며 위에는 마을에서 보호수로 지정해 놓은 200년이 넘은 구실잣밤나무가 콩짜개덩굴을 잔뜩 매단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이 당은 옥황상제의 막내딸을 모시고 있는 특이한 경우다. 하늘의 신이 인간 세계에 귀양을 와서 인간을 수호하는 본향당 신이 된 얘기는 제주시내 오등동이나 해안동의 대별왕 소별왕 본풀이가 있다. 곡식 낟알을 까먹은 죄로 귀양 정배된 옥황상제의 7공주 중 막내딸은 한라산으로 내려와 사라오름-물장오리-거친오름-형제봉으로 해서 가시덤불을 헤치며 내려오다 보니, 머리가 헝클어지고 형색이 말이 아니었다. 건지동산에 와서 건지를 틀고 용강리 궤당 근처에 있는 정좌동산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고 좌정처를 궤당으로 정했다는 애달픈 사연이 본풀이 내용이다.
내가 세 번이나 찾아가면서도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은 동회천 마을 제단인 오석불이다. 회천동 화천사 경내에는 다섯 개의 석불과 그 신들을 보좌하는 산신과 요왕(龍王) 등 일곱 개의 자연석불이 모셔져 있다. 특히 이곳에 와서 이 불상에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속설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그 때문에 절이 지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절 바깥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이 있어 이 마을이 설촌 되기에 이르렀고 마을 이름인 회천(回泉)이 생긴 것이다. 나무가 우거져 있어 경관도 수려하다.
오석불(五石佛)은 상반신이 좌상(坐像)으로 보이는 신상(神像)들이며 크기는 85㎝ 정도, 좌우에 있는 산신상과 요왕상은 그보다 좀 작다. 이곳 동회천에서는 마을제를 지내는 대신 이곳에서 석불제를 지낸다.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제를 지내는데 제관 이외에는 아무도 참석할 수 없다. 제물로 돼지를 쓰지 않으며 불교적 색채가 짙다. 석불제를 지내면 무병·포태·득남의 효험이 있다고 하며 호열자가 창궐할 때도 이 마을은 무사했다고 한다. 특히, 석불제를 지낼 때는 이 석상에다 송낙(고깔)을 씌우고 종이옷을 해 입히고 실로 허리를 맨다는 점이다.
이 밖에 봉개 서회천 본향당과 동회천 본향 새미하르산당, 도련1동 도련드르 일뤠당, 화북동 본향 가릿당, 화북동 윤동지 영감당을 둘러보며, 문무병 시인의 구수한 해설과 민속학자 주강현 선생의 걸쭉한 강의가 곁들여진 좋은 하루였다. 외래의 강력한 종교가 들어오고, 하루가 다르게 개발되는 도시의 외곽지이지만 아직도 이런 성소(聖所)가 남아 숨쉰다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앞으로 잘 보전하는 방향을 서둘러 마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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