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쭉꽃)
▲ 진시황과 불로초, 그리고 서불과차
우리가 정방폭포를 찾은 것은 3월 6일, 개구리가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일이었다. 산북(山北)에는 하루종일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는데, 한반도 중부에는 눈으로 내린다는 방송이다. 성판악을 지나면서부터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고 대신 동남풍이 제법 거세다. 사진을 못 찍을까봐 걱정했는데 시계(視界)가 제법 넓어지고 빗방울이 줄어들다가 정방폭포에 도착하면서 아예 그쳐버린다. 그만 하면 한라산 남과 북의 기후가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알만하다. 차에서 내려 폭포로 들어가려다 길가에 피어있는 한 무더기 연분홍 꽃에 정신이 팔려버린다. 금년 들어 처음 보는 산철쭉 꽃이었다.
기분이 좋아져 폭포로 내려가는데, 눈앞에 가득 펼쳐진 것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 그 위용에 이름난 폭포가 무색해져 버린다.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초를 캐러 왔던 서불(徐市) 일행이 돌아갈 때도 이랬을까?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을 뒤져 시로미 정도를 채취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못 미더워, 분명히 왔다 간다는 표지(標識)로 새겨놓았다는 '서불과차(徐市過此)' 또는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씨는 어디 숨어 있단 말인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정방폭포 앞바다)
근래에 들어 기념비라도 세워 그 글씨를 새기고 중국 관광객을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모양이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하면서 탁본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남해도에 있는 상주리 석각인 것 같다. 기계로 재서 판 것이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닮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고증을 거치려면 그곳에 가서 탁본을 해다가 잘 비교 검토한 끝에 세워야지 세워 놓고 웃음거리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다. 만약에 그 탁본이 상주리 석각의 것이었다면 뒷면에다 그 출처를 밝히면 떳떳하지 않을까.
▲ 영주10경 '정방하폭'에도 4. 3의 비극이
정방폭포와 그 주변 경관이 연출해내는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소나무를 중심으로 절벽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상록식물들. 사철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휘늘어진 보리밥나무 사이에 송악이 푸르다. 천선과나무가 잎을 떨군 채 하나둘 박히고, 사스레피나무와 우묵사스레피나무도 꽤 많다. 아무래도 후피향나무, 돈나무, 후박나무, 까마귀쪽나무는 자생이고, 향나무나 종려나무, 동백, 산철쭉은 심어놓은 것 같다. 매번 올 때마다 눈에 거슬리는 건데 과거 관광지를 꾸미려고 심어놓은 주변 식생과 어울리지 않은 화초는 뽑아버리면 어떨까?
(아그배나무꽃)
오늘 같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펄럭이는 휘장 아래 해산물을 펼쳐놓고 파는 아줌마들도 여전하고, 주변에 어울리지 않게 써 붙인 여러 가지 경고문도 요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아름다운 건 자연이 우리에게 내려주는 한없는 은총 때문일 것이다. 어찌 여름에만 멋있다고 영주10경엔 '정방하폭(正房夏瀑)'이라 읊었는가?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 어느 때라 싫증이 날 리 없다. 다만 눈에 보이는 것에만 혹해 그 장엄한 폭포 소리와 파도와 자갈이 주고받는 은밀한 속삭임까지 들으려 하지 않은 귀먹음이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도 4·3은 많은 아픔을 남겨 놓았다.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될 당시 이곳 절벽은 산남에서 가장 큰 학살 터가 되어 살벌하게 처형되었다. 토벌대는 기암절벽의 폭포와 부근 절벽 소낭머리에서 '살인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전신주와 나무에 잡아온 주민들을 줄줄이 엮어놓고 총알을 아끼려고 한 방을 쏜 뒤 모두 떨어져 죽게 했다는 것이다. 이제 4·3도 정리되어 가는 시점에 이르렀다. 일이 시원히 해결되는 날, 이곳에서 해원(解寃) 굿이라도 걸판지게 벌여 그 원혼의 넋을 달래주면 어떨까.
(탐라순력도 중 '정방탐승')
▲ 한 겨울에 벌어진 뱃놀이, 정방탐승
목사 일행이 이곳에 이른 것은 음력 11월 5일, 양력으로는 동지(冬至) 다음날인 12월 23일이었다. 목사는 폭포가 잘 보이는 절벽 위에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앉아 뱃놀이를 구경하고, 바다엔 2척의 유람선이 떠 뱃놀이를 한다. 당시는 절벽 위에 노송이 우거지고 못과 바다가 이어졌는지 정방연(正方淵)이라 하여 절벽 아래까지 질펀하게 그려놓았다. 군기는 한쪽으로 모아 세우고 수행원들도 쉬며 경치를 즐기는 모습이다. 폭포의 길이는 80여 척, 너비는 5척으로 기록돼 있다.
2개의 깃발을 단 큰배에는 두 남자가 배 가운데서 춤을 추고 이물에 앉은 두 남자 악공과 고물에 앉은 4명의 여악사, 그리고 서서 신나게 악기를 연주하는 한 여인의 모습 뒤로 꾸부정하게 키를 잡고 있는 뱃사공의 모습이 익살스럽다. 한쪽에 서 있는 작은 배에서는 그를 구경하고 있음인지 3명의 남자와 7명의 여자 그리고 뱃사공이 한가롭다. 이 그림의 구도로 보면, 아무래도 당시 이곳의 모습이 오늘날과 많이 달랐던 것 같다. 한겨울의 날씨인데도 바다가 저렇게 잔잔한 것은 오늘 저 파도와 비교해서 아무래도 격세지감이 있다.
문섬[文島]은 그렇다 치고 섶섬[森島]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런데, 저 옷을 벗은 모습의 의탈도(衣脫島)는 어딜까? 이형상 목사가 쓴 <남환박물(南宦博物)>의 대머리섬 '독도(禿島)'란 말인가? '섬의 돌은 모두 검고 추한데 이 섬은 흰돌이다. 깎은 것 같고, 간 것 같다. 또, 기이한 반석과 괴이한 벽석이 많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누가 석재(石材)를 탐하여 그 섬을 훼손시킨 건 아닐까? 아무래도 고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정방폭포에서 주차장으로 올라오면서 아무리 살펴도 단서가 될만한 것은 보이질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옷 벗은 섬'과 '대머리섬'은….
(정방폭포 바닷가에서 본 문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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