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11) 서귀조점(西歸操點)

김창집 2003. 6. 17. 20:42


 

(이중섭 살았던 집과 뒤로 보이는 이중섭 기념관)

 

▲ 이중섭 기념관의 '이중섭과 친구들' 전시회

 

 서귀진성 자리를 찾아가는 길에 이중섭 거리 입구에 있는 기념관을 찾았다. 이곳은 이중섭이 한국전쟁(6.25)이 한창 진행되던 1951년에 가족과 함께 피난 내려와 1년여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서귀포시가 그를 기리기 위해 이곳을 '이중섭거리'로 명명하고, 그가 세 들어 살던 집터를 매입해 초가집을 복원하는 한편 그 위쪽으로 전시관을 세워 놓았다. 정낭을 놓고 울타리에 송악을 올린 것까지는 좋은데, 초가집이 어딘가 친숙해 보이지 않는다. 마당에 심어 놓은 수선화 같기도 하고 은방울꽃을 닮기도 한 이름 모를 꽃처럼 낯선 모습이다.

 

 마침 '이중섭과 친구들'이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는 서울 가나 아트센터 이호재 대표가 화랑 개관 20주년을 맞아 이중섭의 원화 8점과 박수근의 회화 2점 등 모두 65점을 기증한 계기로 마련된 것이다. 그 동안 서귀포시에서는 10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연건평 200여 평 규모로 전시관을 개관했으나 이중섭 원화가 1점도 없어 안타까웠었다. 전시작 중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은 전시관 1층에 걸린 2호 크기의 유화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다. 이중섭이 아내, 그리고 두 아들과 피난생활을 하면서 그렸던 작품이다. 그 외에도 유화 '연과 아이', '어린이와 게', 가족의 모습을 그린 은지화 3점, 엽서화와 드로잉 등 이중섭의 원화가 전시돼 있다.

 

 

(이중섭의 대표적인 그림 '흰소')

 

 그 외의 작품은 이중섭과 교유했던 친구들의 작품 50여 점이다. 권옥연 김병기 김환기 박고석 박생광 박수근 윤중식 이응노 장리석 장욱진 전혁림 정규 중광 최영림 하인두 한묵 한봉덕 황염수 황유엽 등의 작품. 가나 아트센터 이호재 대표는 "원화 없이 복사본만 걸려 있는 전시관이 너무 애처로워 그와 절친하게 지낸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기증하게 됐다."며 "마티스나 샤갈 미술관이 니스를 세계적인 문화 휴양도시로 격상시킨 것처럼 서귀포도 이중섭 전시관을 통해 문화도시로 발전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다. 그리 나이도 많지 않아 보였는데 정말로 참 예술을 아는 멋진 사람이다.

 

▲ 서귀진성에서 군기를 점검하는 그림 '서귀조점'

 

 이중섭 기념관에서 천지연 쪽으로 내려오면서 서귀진성 터를 찾았으나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림에서 위치를 확인하고서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었다. 서귀포 제일교회 옆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솔동산에 올라 찾아보니 자동차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공터에  표지석과 함께 약간의 성의자취가 남아 있다. 두 곳이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 2필지는 진성의 복원을 위해 벌써 땅을 매입했나 보다. 표지석에는 2000년 11월1일 '제주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55호 서귀진지'라 되어 있고, 지정구역은 7,895㎡로 나와 있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중 '서귀조점' 부분)

 

 음식점과 일반 주택이 들어선 진터를 돌며 성굽을 확인해 본다. 원형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얼마 안 되고 원 돌을 이용해 울타리로 변형시켜 쌓거나, 석축으로 다시 쌓은 곳들 외의 다른 시설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사실 옛 서귀포 지역에는 오래된 유적이 거의 없는데 연대나 봉수대를 제외하면 그나마 이곳이 유일한 방어유적인 셈이다. 원래 방호소와 수전소를 겸한 서귀진은 중종 5년(1510)에 장림(張琳) 목사가 홍로천변에 설치했었다. 그곳이 너무 들어가 있어 불편했는지 선조 22년(1589)에 이옥(李沃) 목사가 이곳으로 옮겨 둘레 825척, 높이 12척으로 쌓고, 정방연의 물을 수로로 끌어다 쓰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1702년 11월 5일 정방폭포를 구경하고 나서 곧바로 서귀진을 점검한다. 그림을 보면 왼쪽으로 천지연의 폭포와 울창한 나무들을 그리고, 위로는 구서귀(舊西歸)에 말을 점검하기 위한 시설과 말이 보인다. 거의 바닷가에 위치한 진성은 동문과 서문, 병고(兵庫)를 비롯한 건물들이 북서쪽으로 나타나있다. 이 날 정의현감 박상하(朴尙夏)와 대정현감 최동제(崔東濟)와 함께 점검한 내용은 조방장 원덕전(元德全) 이하 성정군 68명, 목자와 보인 38명, 말237필과 군기들이었다. 당시 서귀진에 속했던 봉수로는 자배(資盃), 호촌(狐村), 삼매양(三梅陽) 봉수, 연대는 금로포(金路浦), 우미(又尾), 보목(甫木), 연동(淵洞) 연대였다.

 

 

(그 날 서귀진성터 주변에서 찍은 수선화)

 

▲ 영주12경 중 하나인 '서귀진성'의 별바라기

 

 영주12경의 마지막 하나는 '서진노성(西鎭老星)'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서귀진에서 노인성을 바라보는 경치'이다. 노인성(老人星)은 수성(壽星)으로도 부르며, 남극노인(南極老人)이라 하여 우리 나라와 중국에서 예로부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믿었기에 왕이 노인성을 향해 제사를 올리는 풍습도 있었다. 사실 이 노인성은 서양에서 말하는 용골자리(Carina)의 카노푸스(Canopus)라는 별로 우리 나라에서는 남해 금산이나 제주도에서만 보인다는 별이다. 원래는 붉은 별이 아니지만, 지평선 방향의 두꺼운 대기층에 의해 푸른빛이 흡수되어 붉게 보이기 때문에 더욱 신비롭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별이 보이는 제주지역은 장수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왔다. '금산38경'에도 들어가는 이 노인성은 춘분과 추분을 전후한 7일 사이에 관측할 수 있다고 한다. 이번 4월 8일에 서귀포문화원이 마련한 '제1회 서귀포 남극 노인성(老人星)축제'는 서귀진성 자리가 아닌 삼매봉에서 열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거 이곳 서귀진성은 생각만 하여도 멋있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한라산이 눈앞에 우뚝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옆으로 천지연의 물소리가 들리고, 눈 앞 넓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섬들. 저물녘에 바람 쐬러 나온 노인들은 그 아름다운 경치를 맑은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게다가 평생 한 번만 봐도 오래 살 수 있다는 별의 수평선을 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면….

 

 현재의 서귀진성 자리는 속칭 '솔동산' 동쪽 지역인 서귀동 717번지이다. 1906년(광무10)에 일본에 의해 진성의 폐지되고 옛 건물에 서귀순사 분파소(지금의 파출소)를 설치하여 일제강점기에는 이 곳에서 주민들을 못 살게 굴던 곳이다. 이래저래 영욕이 깃든 이곳에다 다시 서귀진을 복원하는 꿈을 꾸어 본다. 어디든 유서 깊은 도시엘 가보면 오래된 유적이 남아있어 살아있는 박물관 구실을 한다. 이렇다할 유적이 없는 이곳에 성을 쌓고 건물은 지어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마당에서는 해마다 노인성 축제도 열고. 그러면 이중섭 거리와 천지연을 잇는 좋은 역사의 장이 될 것이다.

 

 

 

(솔동산에서 노인성이 뜨는 자리에 위치한 범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