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13) 고원방고(羔園訪古)

김창집 2003. 8. 27. 05:59

 

(숲 너머 안개 사이로 보이는 엉또 폭포. 5월 25일 찍음)

 

▲ 비가 많이 와야 이루어지는 엉또폭포

 

 제1횡단도로로 서귀포에 넘어가 중산간도로를 통하여 옛 고원방고 터인 용흥동으로 가다가 엉또폭포에 들르기로 했다. 오다가 동수교, 논고교, 수악교, 상효교를 지나면서 냇물이 많이 불어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이곳을 넘어가다가 엉또에 가서 멋진 폭포를 본 적이 있기도 하다. 월드컵 보조경기장 앞 산림조합 임산물 직매장 옆에 커다란 간판들 속에 세로로 조그맣게 '엉또폭포 1.5km'라고 써 붙인 게 보인다. 좁은 길로 올라가 왼쪽으로 한참을 달리면 높은 절벽에 풀과 나무가 우거진 곳이 보이는데, 그 앞 과수원으로 들어가면 바로 엉또폭포다.

 

 그러나, 오늘은 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이곳은 영실 쪽에 집중호우가 내렸을 때 폭포가 형성되는데, 어젯밤은 비가 성판악 쪽으로만 집중된 것 같다. 물은 흐르지 않지만 50여m 천인단애를 이루는 바위와 주위에 상록수가 우거져 그런 대로 경치가 좋다. '엉'은 제주어로 '속으로 움푹 들어간 절벽'을 말하고, '도'는 '입구'를 뜻하는데, 이 두 말이 결합 과정에서 된소리로 변해 '엉또'가 된 것이다. 이태 전 비가 많이 오다 갠 날에 왔을 때는 떨어지는 물이 서로 부딪치면서 일으킨 물보라가 날아오르면서 만들어 놓는 무지개에 정신이 팔려 한동안 신선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다.

 

 

(별장의 근간이 되었고, 아직도 수량이 풍부한 샘 '운량천')

 

▲ 밀감 과수원으로 변해버린 고둔과원(羔屯果園) 터

 

 서쪽으로 나와 조금 더 가다가 중산간도로 왼쪽 용흥동으로 내려가니, 운랑천(雲浪泉)은 예나 다름없이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이샘을 중심으로 왕자가 머무는 집을 지었고, 후에 고득종이 그 터에 다시 별장을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탐라순력도에는 이 물을 이용해 만든 논이 보이고, 집이 몇 가구 그려져 있다. 이형상 목사가 정의·대정 두 현감과 함께 놀았던 왕자구지(王子舊址)로 짐작되는 곳에는 올 들어 10세대의 다가구 주택이 지어지고 앞으로는 주차장을 만들어 포장해 놓았다. 샘 주변에는 이곳마을길을 포장할 때 토지 160여 평을 기증했다는 재일교포 문성종(文成鍾)씨의 공덕비가 서있고, 과수원 방풍림인 삼나무와 다가구 주택 입구에 머귀나무, 버드나무가 울창하다.

 

 고득종(高得宗, 1388∼1452)은 호가 영곡(靈谷)으로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으며, 1413년(태종13) 효행으로 천거하여 직장이 된 후, 이듬해 알성문과에 급제했고, 1427년(세종9) 문과중시에 급제하면서 여러 벼슬을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까지 지낸 분이다. 1448년 도전운사(都轉運使)가 되어 미곡의 조운(漕運)에 힘썼다. 그가 살았던 곳을 가늠하고 염돈과원 터로 보이는 오래된 돌담이 있어 다가가 본즉 확신은 못하겠고, 그위에 마삭줄이 얽혀 하얀 꽃만 무수히 피워대고 있었다. 그곳 과수원 구석으로도 수로에 물이 흐른다. 안에는 2∼30년생 밀감나무가 가득 자라고, 무덤도 몇 기 들어앉았다. 저 밀감나무가 옛날 그 과원의 감귤나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 본다.

 

 

(옛 고둔과원 터에 조성된 감귤밭)

 

▲ 과원에서 술과 음악을 즐기는 그림 고원방고

 

 이제는 제주도 일부 고지대를 제외한 어느 곳에도 방풍을 잘 해 비료를 주고 약만 잘 치면 밀감나무가 잘 자라지만, 과거 이곳은 따뜻하고 토질이 좋아 그대로 두어도 귤이 잘 달렸던 것 같다.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보다 50년 정도 빠른 이원진의 '탐라지(1653)'를 보면, 당시 이곳에 심어있던 귤은 '유자 66주, 석금귤 12주, 당유자 1주, 지각 3주, 치자나무 51주, 산귤 22주, 청귤 3주, 유감 4주, 동정귤 3주와 과원 밖에는 매화가 많이 있다.'고 나온다. 고원방고 그림도 가만히 살펴보면 위로는 참나무가 우거지고 아래 울타리에 방풍림 대나무가, 담 밖으로는 매화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씌어진 '고둔(羔屯)'은 '염돈'의 차자 표기로 '고(羔)'는 '염소'를 뜻하는 한자다. '탐라지'나 '한라장촉', '제주읍지' 등에는 '고둔'으로 '탐라지도'와 '제주삼읍총지도', '해동지도' 등에 '고둔촌'으로 나온다. 마을 아래에서 말을 쉬게 하고, 과원 입구에는 군기를 세우고 앉아 쉬면서 경계하는 모습이 독특하다. 나무 아래에도 몇 사람이 앉아 감귤을 보고 있고 과원 한쪽 왕자구지에는 목사가 양산 아래에 앉아 술을 들면서 악기 연주와 노래를 감상하고 있다. 이 날 동행했던 정의현감 박상하(朴尙夏)와 대정현감 최동제는 조금 떨어져 앉아 있는 모습이다.

 

 

(울타리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마삭줄꽃)

 

▲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순력 일정

 

 목사 일행이 이곳을 찾은 것은 1702년 11월 6일, 양력으로는 12월 24일이다. 이 날은 서귀진에서 자고 일어나 천지연에서 활쏘기를 즐겼는데, 천연사후가 그 그림이다. 그런데, 탐라순력도에는 같은 날 천제연에서 활쏘기를 즐기는 현폭사후(懸瀑射帿) 그림이 천연사후 다음에 나와 있고, 그 뒤에 이곳 고둔과원을 방문해 귤 향기를 맡으며 논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 같이 도로가 잘 발달되어 편리한 교통 수단을 이용한다면 몰라도, 짧은 겨울 해에 이곳을 지나쳐 천제연에 먼저 가서 활쏘기 행사를 하고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다. 그리고, 이 날 일정이 끝나고는 사흘 동안 아무런 행사가 없다가 11월 10일에야 산방굴에 올라 술 한 잔 마시고 대정현으로 가서 대정조점 순력 일정이 진행된 것으로 되어 있음에랴.

 

 그러면, 사흘 동안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렇다고 제주목에 다녀온 것도 아니고, 시간이나 정황으로 보건대 아마 이곳에서 한 이틀 푹 쉰 다음 날 천제연에 가서 활쏘기를 즐기고  또 하루를 묵은 다음 산방산을 거쳐 대정현으로 들어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목사가 이 과원을 보고 "풍치로 말하면 가을, 겨울 낙엽 질 때에도 과원은 홀로 푸르다가 봄철 녹음으로 단장해 하늘을 가리우고 노란 열매는 햇빛에 비치니, 나무마다 영롱하고 잎마다 찬란하다."고 극찬하며, "귤밭 사이에 매화가 섞여 있고 치자(梔子)가 있으니, 그 밑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면 겨울의 추위를 깨닫지 못한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그 날로 이렇게 좋은 곳을 떠났을 리가 없다.

 

(*'제주시정소식지'에 실었던 글입니다.)

 

 

(이형상 목사 일행이 순력 도중 머물렀던 그림 '고원방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