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15) 산방배작(山房盃酌)

김창집 2004. 1. 10. 11:31

 

(구름 모자 쓴 산방산)

 

▲ 영주10경의 반열에 오른 경치

 

 제주 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너무도 절묘하다. 섬 동남쪽 끝 성산리에 일출봉을 세우고 한라산을 중심으로 그 대칭이 되는 서남쪽 해안가에 높이395m의 아담한 봉우리를 얹혀 놓았다. 만약 이 산방산이 없이 한라산의 흐름을 이곳에서 밋밋하게 마감해버렸다면 얼마나 허전했을까? 우리가 이곳을찾은 날은 바람이 제법 세게 부는 데도 불구하고 산머리에 구름을 이고 있었다. 언젠가 서울에서 온 신문사 기자들과 이 산 정상에 올랐을 때도 구름이 안 벗겨져 '산 할아버지 구름 모자 썼네.' 하면서 그 현상을 살핀 적이 있다. 해수욕장에서 절벽을 타고 올라오는 차가운 바람은 구름을 밀고, 밀려난 구름은 봉우리를 안고 돌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현상이 계속되면서 구름은 산봉우리에 걸려 빙빙 돌며 떠나질 못했다.

 

 절이 사람을 먹여 살린다드니, 이제는 산방굴 밑으로 기념품 가게와 음식점이 자리잡고 그 위로 산방사(山房寺), 광명사(光明寺), 보문사(普聞寺) 등 3개의 절이 좁은 목에 촘촘하게 들어섰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서 산방산의 역사를 더듬는다. 약 150만년 전 땅속 깊은 곳에서 불완전하게 꿈틀대던 용암이 솟아오르면서 바다 위로 머리를 내민다. 아주 천천히 바다 밑의 지층을 머리에 쓰고 나온 용암은 밖으로 분출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다. 그렇게 밀어 올리기를 계속하면서 산은 점점 높아지고 파도에 침식된 굴까지 들어 올려 오늘날에는 산방굴이 이처럼 높은 곳에 자리하게 되었다.

 

 

(산방산으로 오르는 길의 절들)

 

 바다와 높이가 같았을 때 떨어지던 물방울도 그대로여서, 사람들은 이곳에 올라 그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돌아서서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전설을 만들어내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바다와 섬의 어울림은 완벽한 한 폭이 그림이 되어 영주10경의 반열까지 올랐다. 그러나, 오늘은 북적이는 사람들의 수런거림으로 바위에 금이 가게 되어, 떨어지는 돌을 막으려고 시야를 가리는 철망을 얼기설기 매어 놓은 꼴이라니.

 

▲ 굴에서 술 한 잔하는 그림인 '산방배작'

 

 1702년(숙종28) 11월 10일. 순력중인 이형상 목사 일행은 이곳을 지나가다가 굴에 올라 좋은 경치를 바라보면서 술 한 잔하게 된다. 어디서 잤다가 어느 시간에 이곳에 들렀는지 모르지만 대정현에 가서 조점(操點)까지 한 걸로봐서 한낮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맨처음 이 '산방배작(山房盃酌)' 그림을 봤을 때는 목사 일행들이 꼭 고래 입안에 앉아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그래서얼핏 생각하기를 '누구는 저렇게 앉아 술을 마시고, 누구는 추운데서 벌벌 떨며 그림을 그리냐' 하는 김남길(金南吉) 화공의 심술이 작용하지 않았나 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그림이 주는 신선함이 산방산을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한다.

 

 

(김남길  화공이 그린 '산방배작')

 

 언제 잽싸게 이곳에 올랐다 내려가서 작업을 했는지는 몰라도, 방향 감각을 무시하고 본 것은 모두 그려 놓았다. 행여 빠뜨릴까 이름까지 쓰면서. 산방연대와 용머리, 사계 포구인 흑로포(黑路浦)도 그리고, 형제섬과 송악산까지 끌어다 놓았다. 어디 그뿐이랴. 산방산 뒤에다 군산을 그리고 감산(紺山)을 표기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욕심을 부린다면 화순해수욕장과 월라봉을 빼놓은 것이 못내 아쉽다.

 

▲ 아리송한 용머리와 하멜의 인연

 

 산방산에서 내려와 길옆 동산의 산방연대에 올랐다. 이 연대는 대정현에 소속되었던 곳으로 동쪽의 당포연대(唐浦煙臺), 서쪽의 무수연대(茂首煙臺)와 교신했던 곳이다. 4·3 당시 사계리에 급히 성을 두르면서 돌을 가져갔는지 굽 몇 덩이 남았던 것을 새 천년 드는 해에 사업비 1억원으로 복원해 놓은 것이다. 다른 데서 흔히 볼 수 없는 방호벽에다 계단까지 놓았다. 복원이면복원(復元)으로 끝나야지 요즘 도내 곳곳에 다시 세워지는 연대들이 고증(考證)도 없이 이러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용머리 바닷가)

 

 내려가면서 하멜기념탑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1980년 4월 1일 한국국제문화협회와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 의해, 두 나라의 우호 증진과 하멜 공덕의 증표로 세워진 독특한 형태의 비다. 우리 나라를 서방 세계에 최초로 알린 유럽인은 1653년 8월 16일 제주도 부근해역에서 태풍으로 난파당하여 표류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원들. 핸드릭 하멜을 포함한 64명의 선원들을 태운 상선 '스페르타호'는 대만에서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 도중, 대만해협에서 치명적인 폭풍을 만나 이곳까지 흘러 난파된 것이다.

 

 '하멜 표류기'는 고국으로 돌아간 하멜이 쓴 책으로, 그 일행이 일본으로 가던 도중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하게 된 사정과, 그 후 14년간의 억류 생활 중에 보고들은 우리 나라의 생활 모습, 그리고 1666년 하멜이 7명의 동료와 함께 일본으로 탈출하기까지의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 나라 사정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역으로 당시 우리 나라의 사정을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네덜란드의 대양 항해용 상선인 '바타비아호'를 모델)

 

 내친 김에 용머리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다. 수천만 년 동안 쌓여 이루어진 사암층은 속살이 무른 까닭으로 풍화작용에 의해 여기저기 깎이고 할퀴어 이런 절경은 낳아놓은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곳 아주머니들이 해산물을 놓고 팔고 있다. 그래도 이곳에서 따낸 전복이나, 오분자기, 소라, 해삼, 대합정도는 놓고 팔아야 하는데, 내용이 빈약한 것으로 보아 요즘 물질이 시원치 않은 것 같다. 산방배작은 아니더라도 술 한 잔 않고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아 쪼그려 앉아 회 한 접시에 소주 한 병을 비웠다.

 

 나와서 이제 막 개관을 끝낸 하멜 상선 전시관으로 갔다. 전시관은 난파당했던 스페르타호의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사실 요즘 들어 정확한 표류지가 어딘지 논란이 일고 있으나, 아쉬운 대로 이곳에 서게 된 기념관의 배는 17세기 네덜란드의 대양 항해용 상선인 '바타비아호'를 모델로 재현시킨 것이라 한다. 그 배를 보면서 네덜란드와의 묘한 인연을 생각한다. 아! 그 때 우리 조상들은 이들을 어떻게 대접했던가? '히딩크 기념관'에는 작년 월드컵 때 우리를 열광시켰던 그의 미소가 빛나고 있었다.

 

 

(강부언 화백의 '산방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