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16) 대정조점(大靜操點)

김창집 2004. 1. 20. 16:55


 


(대정현성의 박, 2003년 9월 19일 찍음)

 

▲ 성(城)은 다 복원되어 가는데

 

 제주시에서 서부관광도로를 달려 도착한 대정현 터. 동문(東門)이 있던 자리 양쪽으로 길게 복원된 성(城) 위에 박넝쿨을 올려놓아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몰라도 오랜만에 보니,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원래 제주서도(濟州西道)였던 대정현(大靜縣)은 조선 태종 16년(1416)에 당시 안무사 오식(吳湜)의 건의로 한라산 남쪽을 둘로 나누어 동쪽의 정의현(旌義縣)과 같은 시기에 설치된 현(縣)이었다.  

 

 이곳에 처음 성을 쌓은 것은 현을 설치한 2년 뒤인 태종 18년(1418) 봄이었다. 당시 대정 현감이었던 유신(兪信)은 둘레 2,800여 척에 높이 10척의 석성(石城)을 쌓았다. 기록에는 없지만 그 후 지금의 인성리, 안성리, 보성리에 걸쳐 둘레 4,890척, 높이 17척4촌(寸)이나 되는 거대한 성으로 발전한다. 동·서·남·북의 4개의 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외부의 침입이 잦아 폐쇄되었다고 하며, 그 후 여러 번 성을 증·개축하며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와 4·3을 거치면서 허물어지고 유실된 것을 근래에 연차적으로 복원 중이다.

 



(복원해 놓은 대정현성의 일부)

 

 원래 대정현성 안에는 아사(衙舍), 향사당, 어변청, 관청, 현사, 청풍당, 진리청, 작청, 옥사 등이 있었다. 아사(衙舍)는 현감이 행정을 집무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객사 서쪽에 있었고, 향사당은 객사 남쪽에 있었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변청은 객사 남쪽에 있던 장교청이었고, 관청은 아사 동쪽, 현사는 호장 집무처로 아사 북쪽에, 청풍당은 아사 동쪽에 위치하며 진리청은 향사당 동쪽, 작청은 아사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사라져 어디에 뭐가 있었는지, 찾아볼 길이 없다. 모처럼 성벽은 복원되고 있는데, 그 속에 있었어야 할 건물들은 하나도 없으니, 탐라순력도를 보면서 그래픽 디자인의 기술을 빌려 한쪽에 커다란 그림 하나 만들어 걸면 어떨까?  

 


 

(추사기념관 앞에 서 있는 돌하르방)

 

▲ 유배의 땅 대정현(大靜縣)  

 

 서문 성안으로 들어서는데, 한쪽 팔에 깁스를 한 것 같은 돌하르방이 뚫어져라 나를 쳐다본다. 저 돌하르방은 과연 이형상 목사 일행의 순력 행사를 지켜봤을까 못 봤을까 의문이다. 김석익의 '탐라기년(耽羅紀年)'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 30년(1754)에 '목사 김몽규(金夢 )가 성문 밖에 돌하르방을 세웠다.'고 나오는데, 이 때 처음으로 만들어 세웠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던 것을 보고 만들어 성문밖에 세우기 시작한 건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곳에 유배 왔던 추사 김정희 선생은 저 돌하르방을 자주 대면했을 것이다. 추사 기념관 앞에 서 있는 돌하르방은 손이 가슴에까지 올라가 국기에 경례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크기는 아무래도 정의현성에 세워져 있는 것보다도 작아 보인다.

 


 

(대정현성 안에 자리잡은 추사기념관)

 

 성안 관청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이러니 하게도 유배 중에 김정희가 머물렀던 추사적거지와 기념관이 떡 버티고 있으니, 이 나그네 할 말을 잃는다. 기념관은 그대로인데 1984년 10월 28일 남제주군에 의해 지어놓은 적거지(謫居地) 초가집은 태풍 때문인지 많이 훼손되었다. 헌종 6년(1840) 10월 1일 이른 바 '윤상도(尹尙道) 옥사'에 연류되어 55세의 나이로 이곳 대정에 도착한 추사 선생은 처음에는 송계순(宋啓純) 집에서 지내다가 이곳 강도순(姜道淳) 집으로 옮기며 해수로 9년 동안 적거 생활을 하다 헌종 14년(1848년) 12월 6일 방면된다. 적거 생활을 하는 동안 지방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전수하고 많은 서화를 남기는데 국보 제180호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는 이곳에서 나온 작품이며, 이 시기는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는 계기가 된다.  

 


 

(헐리기 전의 추사적거지 집 마당과 초가집)

 

 한편 관아가 있었던 보성초등학교 정문 왼쪽에는 '동계 정온 유허비(桐溪鄭蘊遺墟碑)'가 서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제주 5현' 중의 한 분인 정온 선생은 광해군 6년(1614) 8월 영창대군을 죽인 정항(鄭沆)의 참형과 폐모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곳 대정현에 유배되어 10년 동안 적거 생활을 하다가 인조 원년(1623) 5월에 방면되어 간 인물이다. 이 비는 헌종 8년(1842) 당시 목사였던 이원조가 동계의 적소가 있던 대정성 동문 안 속칭 '막은골'(안성리)에 처음 세웠던 것을 동문 성밖에 옮겼다가 1963년 보성국민학교로 옮겼고, 1977년 4월 결국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한다.

 


 

(보성초등학교 정문 옆에 서 있는 동계 정온 유허비)

 

▲ 대정현성의 군기를 점검하는 그림 '대정조점'

 

 1720년(숙종 28년) 음력 11월 10일 산방굴에 올라 시원한 바다를 보며, 술 한 잔 들이킨 이형상 목사 일행은 그 날의 숙소이면서 순력 행사지인 대정현성에 도착한다. 이후 이곳에서 여러 가지 행사를 치르며 3박4일간 머물게 되는데, 대정조점(大靜操點)은 그 날 치러진 첫 행사인 셈이다. 그림을 보면 점검하는 장면은 안 나오고 조점을 준비해 모든 걸 갖춰놓고 숨죽여 대기해 있다. 또한, 목사 일행이 도착하는 장면이 성을 둘러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남문 밖에 현감 이하 관리들이 나와 절을 하며 그들을 맞고 있다. 

 

 성 위에는 군기가 펄럭이고 밖으로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는데, 성안에는 점검 대상인 마필을 차례로 세워놓고, 강사(講射)를 위해 과녁과 화살을 준비한 군인들이 차분히 앉아 기다리는가 하면, 나머지 병사들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아 점검 받을 준비를 마친 모습이다. 그림 뒤에는 병풍처럼 군산[破軍山]이 둘러 있고 그 너머 왼쪽으로는 산방산 한쪽 귀퉁이가 보인다. 대정현성 안에는 객사(客舍), 군기고(軍器庫), 향청(鄕廳), 작청(作廳), 관아(官衙), 관청(官廳) 등의 건물 위치와 원장(圓場)과 사장(蛇場)이 표시되어 있다.

 


(탐라순력도 중 김남길이 그린 '대정조점')

 

 이날 점검한 내용을 보면, 성장(城將) 2인, 치총(雉摠) 4인, 성정군(城丁軍) 224명 등 대정현성의 성정군(城丁軍) 조련(操鍊) 정도, 그리고 군기(軍器), 문묘(文廟)의 제기(祭器)와 제복(祭服), 서책(書冊) 등을 두루 살폈고, 목자와 보인 123명, 말 849필, 흑우 228수, 창고의 곡식 1,950여 석을 일일이 확인하였음을 아래 부기(附記)된 내용에서 알 수 있다. 당시 대정현의 편제는 읍내 1리, 동면(東面) 9리, 서면(西面) 2리로 모두 12리에 민호는 797호였으며, 전답은 149결이었다.

 


(성안에서 바라본 산방산과 단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