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신탐라순력도

신탐라순력도(17) 대정배전(大靜拜箋)

김창집 2004. 1. 20. 17:00


 


(동문 앞 공터에 서 있는 삼의사비, 1997년에 새로 만들었다.)

 

▲ 의로운 죽음을 알리는 '삼의사비'

 

 성문터를 나서며 지난여름 그 무서웠던 태풍 '매미'를 이겨낸 성담 위의 박이 대견스러워 눈을 주었다가 고개를 돌리니, 새로 단장해 세워놓은 비석이 있었는데 '삼의사비(三義士碑)'였다. 삼의사비는 1901년 신축교란(또는 이재수의 난)을 주도하였다가 처형된 이재수(李在守), 오대현(吳大鉉), 강우백(姜遇伯) 세 장두의 넋을 기리기 위한 비로 1961년 처음 것은 이 의사 손(孫)의 이름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 이름을 빌려 대정군민들이 세운 것이었다. 원래는 큰길가 홍살문 옆에 위치해 있었는데 드레물로 옮겼었다. 지금 이 새 비는 1997년 8월 대정읍 청년회에서 다시 만들어 세운 것으로 당시 비문의 내용과 관련하여 천주교 측과 다소의 갈등이 있었으나 비문에 수정을 가하지 않고 제막했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 1899년 제주에 포교를 시작한 천주교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 때까지 민간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 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사형(私刑)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옛 정취가 묻어나는 어느 골목길의 초가집)

 

 이렇게 시작된 비문은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적고 있으나, 교훈으로 삼기 위한 것인 만큼 뒷부분은 그 쪽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대정은 본시 의기남아의 고장으로 조선 후기 민중봉기의 진원지가 되어왔는데, 1801년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丁蘭珠)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란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1961년 신축에 향민들의 정성을 모아 <제주대정군삼의사비>를 대정 고을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것이 도로확장 등 사정으로 옮겨다니며 마모되고 초라하여 이제 여기 대정고을 청년들이 새 단장으로 비를 세워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

 


 

(단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거욱대' : 방사탑 위에 세운 석상)

 

▲ 대정고을의 허한 곳을 막아 주었던 '거욱대' 

 

 마을을 빠져 나와 단산으로 통하는 길 속칭 알벵디로 갔다. 그곳에는 제주도 지정 민속자료 8-16∼7호인 거욱대가 남아있어 그를 살피려는 것이다. 잘 익은 조가 고개를 숙인 밭을 지나 다음 밭에서 배추 종자를 뿌리노라 여념이 없는 부부에게 양해를 얻어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거욱대로 접근했다. 탑 위에 서 있는 석상이 웃을 듯 말 듯, 어찌 보면 무표정하달 수 있는 얼굴로 우리를 맞는다. 밖으로부터 오는 액운(厄運)이나 잡신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근엄한 얼굴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바라보니, 또 근엄하게 보인다.

 

 이 거욱대는 방사탑(防邪塔) 위에 사람의 형상을 새긴 돌을 세운 것이다. 원래 방사용 탑은 허(虛)한 곳을 보강하고 액(厄)을 막아 마을 사람들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누리기 위해 돌탑을 쌓은 뒤 위에 거욱대를 만들어 세우는 것인데, 이곳 알벵디 지경에는 원래 4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2기만 남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을에서 바라보면 남쪽 단산과 모슬봉 사이가 트이어 그 곳이 허술해 보인다. 옛 사람들도 그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동·서의 탑은 약 70∼80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는데, 평탄한 곳에 위치해 있다. 동탑은 밑지름이 210cm로 원뿔형으로 쌓았는데 윗부분이 허물어져 정확한 높이는 알 수 없다. 크고 작은 현무암으로 거친 다듬기를 하여 허튼층쌓기를 했으며, 속에는 잡석으로 채워져 있다. 석상은 현무암을 대충 다듬어 약식화 된 털벙것 비슷한 모자를 쓰고 눈과 코가 유난히 크다. 서쪽에 있는 것은 동쪽의 것보다 조금 큰데, 밑지름 230cm에 높이가 225cm이다. 역시 동쪽 것과 같은 형태로 쌓아올렸다. 석상은 다공질 현무암을 이용하여 직사각형으로 다듬고 얼굴만 돋을새김을 하였다. 지금은 원래 자리에서 조금 이동하여 밭담 옆에 붙여놓았는데, 귀가 없는데도 보면 볼수록 정겹다.   

 


 

(취재하면서 거욱대 옆에서 찍은 조이삭)

 

▲ 숙종 임금의 결혼을 경하하는 대정배전

 

 대정배전(大靜拜箋)은 1702년(숙종28) 11월11일 대정현에서 시행된 배전(拜箋)의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단산 쪽으로 천막을 설치하고 그 주위를 삼엄하게 경비하며 성에서 나오는 목사 일행을 맞고 있다. 이형상 목사는 막 관아를 떠나 홍살문을 지나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대정현감으로 보인다. '배전(拜箋)'이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지방관이 그 소재지에서 임금에게 전(箋:書面)을 올려 하례(賀禮)의 뜻을 표하는 의식을 말한다. 

 

 당시 숙종실록을 역 추적해 배전의 내용을 추측해 보면, 그 일은 다름 아닌 인현왕후의 뒤를 잇는 계비 곧 인원왕후와의 혼인이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해 8월27일에 가례도감을 설치하고 대혼(大婚) 준비를 시켜 9월3일에 순안현령 김주신(金柱信)의 딸을 배필로 정한다. 9월9일에 혼인 날짜를 10월13일로 잡은 뒤 9월20일에는 어의동 별궁에서 납채례를 행한다. 혼인 다음 날인 10월14일에는 백관들로부터 진하(進賀)를 받고, 8도에 나라의 경사를 알리는 반교(頒敎) 내리는 한편 사면(赦免)을 행하였다.      

 


 

(탐라순력도 중 김남길이 그린 '대정배전')

 

 이 날 제주목에다 교서를 내렸다면 한양에서 이곳 대정현까지 27일이나 걸려 도착한 셈이 된다. 이 날 행했던 내용은 부기에 나와 있지 않아 소상히 알 길이 없다. 다만 남아 있는 숙종실록의 기록 중 교문(敎文)의 내용을 일부 옮겨 본다. '왕은 말하노라.… 올 10월13일에 김씨를 책봉해 왕비로 삼았다. 대혼(大婚)은 백성을 살리는 기틀이니 실제로 치란과 관련되고 소박함은 마땅히 내 몸에서 먼저 행했으니 전긍하는 생각이 더욱 절실하다. 돌아보건대 근본을 만들고 교화를 일으키는 근본은 진실로 내 몸에 있는데, 임금의 배필이 되는 아름다움도 또한 오늘로 연유했다. (중략) 아름다움을 팔도의 백성들과 함께 즐기기 위해 죄를 용서하는 특전을 내린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니 의당 자세히 알 것이다.'     

 


 

(현무암으로 쌓은 대정현성 돌 틈에 낀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