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문화보존회 구좌읍 답사기
(이승만 대통령 별장 '귀빈사' 전경)
◎ 2003년 11월 16일 일요일 바람이 불었으나 맑음
▲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 '귀빈사(貴賓舍)'
엊그제 비가 오고 쌀쌀해서 그런지 아니면 잔치가 너무 많아서인지 모인 인원은 43명. 이 정도의 날씨면 훌륭하다고 오히려 오붓하게 한 차에서 즐기게 되었다면서 즐겁게 출발했다. 기사 아저씨에게 먼저 안전을 부탁하는 박수로 시작하여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데, 동부관광도로 진입 후 차선이 갑자기 줄어드는 길목에 감귤이 흩어지고 차가 두어 대 지났는지 바퀴에 으깨진 것이 많다. 감귤 컨테이너를 싣고 묶지 않았기 때문에 삐끗하여 서너 컨테이너가 떨어진 것. 부지런히 수습하는 것을 보고 내려서 도와주고 가자는 사람이 있었지만 대형 버스가 길 입구를 막아 버리면 교통 소통이 마비 될 것 같아 그냥 가자니 가슴이 갑자기 아려옴을 느꼈다.
오늘은 들국화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한 산국(山菊)이 길가에 유난히 많이 피었다. 이제는 빛이 바래기 시작한 억새도 억센 바람에 마구 손을 내젓는다. 남조로와 마주치는 곳의 검문소를 지나고, 1차 확장공사 구간이 끝날 즈음해서 한쪽에 차를 세우고 이른 바 '총 맞은 비석'을 구경시켰다. 이곳은 정의현이 있는 지금의 성읍에 가기 위해 제주목을 나선 사람들이 쉬었던 '원'이 있던 곳이어서 관원들이 행차가 잦았다. 네 개의 비석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판관이나 위무사 같은 관리의 업적을 기리는 송덕비다. 이곳을 지나면서 가까운 고을의 유지들을 닦달하여 세워놓은 것으로 조천이나 화북의 비석거리의 비석이나 별로 다른 점은 없다. 다만 이곳의 비석에는 4. 3 당시 이 근방에 주둔했던 군인들이 장난삼아 이를 표적으로 총을 쏘았는지 몇 발의 탄흔이 역력할 뿐이다.
(별장 정원에 아무렇게나 자라버린 팽나무)
옛 송당목장 안에 자리한 별장은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두 번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귀빈사'다. 한국전쟁이 진정 국면에 들어서자 이 대통령은 배고픈 국민에게 우유를 먹이고자 '낙농 제주'를 꿈꾸며 고려시대부터 유서 깊은 목장이 있는 제주도에 국립목장의 설립을 지시한다. 관심을 갖고 내도가 잦아지자 측근들은 전용 숙소로 제공하기 위해 1957년에 설계는 미국에서 담당하고 국군공병대가 독일제 자재를 사용하여 시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는 교통이 좋지 않고 호텔 시설이 여의치 못한 시기여서 대통령이 자주 가는 곳이면 별장을 지어 묵었다.
43평의 단층건물에는 당시 이대통령이 사용했던 5평 정도의 침실, 응접실, 벽난로, 원형식탁, 의자, 소파, 침대, 화장대, 수세식변소와 욕조, 주방세트, 냉장고, 가스렌지 등을 비롯하여 16종류의 비품들이 보관되고 있으며, 벽에는 태극기와 이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이 중에 여러 가지 집기들이 어디로 치웠는지 간 곳이 없다. 송당목장의 운영난과 함께 1963년 민간에 이양되었는데, 최근 북제주군에서 복원 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1962년 당시 수학여행차 트럭을 타고 김녕에서 올라오다가 바퀴가 빠져 고생했던 얘기를 하며 웃었다. 건물도 많이 훼손되었고, 팽나무, 비자나무, 주목, 동백, 배롱나무, 무궁화 등 정원수들이 함부로 자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송당 본향당의 금백조를 모신 집. 예쁜 옷이 보인다.)
▲ 동부지역 신당의 메카 - 송당 본향당
송당리는 마을 이름에 당(堂)이라는 말이 들어 갈 정도로 신당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곳이다. 대천동 사거리에서 송당 마을로 들어서서 한두 채 집을 지나 16번 도로와 만나기 직전 오른쪽을 보면, 본향당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있다. 그곳으로 200m쯤 들어가면 당오름 기슭에 동부지역 신당의 메카로 불리는 본향당이 자리해 있다. 제주도의 유서 깊은 당이라면 으레 있을 커다란 신목(神木)이 없어 잘못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관리가 미신을 쫓는다고 앞장서 베어버렸다가 즉사했다고 한다. 전에는 굿을 할 때 천막을 칠 수 있도록 쇠로 골격을 만들어 세워져 있었는데 금년에 지었는지 동쪽으로 조그만 기와집이 서있다.
제물을 벌이는 제단 가운데에는 돌로 조그맣게 집을 지어 '백주또 신위' 팻말을 세우고 고운 옷 한 벌과 신발, 비녀, 가락지 같은 것을 모셔놓고 있다. 향석(香石)에는 일본제로 보이는 가느다란 향 몇 가락이 타다 만 채로 있고, 오른쪽 팽나무엔 빛 바랜 지전물색이 걸리었다. 이곳에서는 여성 위주의 무속적 마을제의 전형으로 1년에 네 번 제를 올리기 때문에 1986년 4월 10일자로 제주도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제일은 1월 13일의 대제(신과세제), 2월 13일 영등 손맞이, 7월 13일 마불림제, 10월 13일 시만국대제이다. 문무병 선생의 쓴 '제주도 당신앙 연구'(1993)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 못지 않은 당본풀이의 내용을 요약하여 보여준다.
"서울 남산 송악산에서 태어난 금백주가 알손당 '고부니모를'에서 솟아난 소로소천국과 결혼하여 아들 열여덟, 딸 스물여덟을 낳고 산다.(토착신과 외래신의 결합, 마을의 형성과 번성) 옷, 밥, 젖을 달라고 조르는 자식들을 기르기 위해 남편과 '오봉이굴왓'을 경작하여 농사를 짓자고 약속했는데(농경 생활의 시작), 시주를 받으러 마을로 가던 동개남 상좌승이 소로소천국에게 점심밥을 달라고 하므로 주었더니 모두 먹고 달아나 버린다.(배고픔의 발생) 시장기가 난 소로소천국은 밭을 갈던 소를 때려 죽여 구어 먹고 심지어는 남의 소까지 잡아먹고 겨우 배고픔을 달래며 쟁기로만 밭을 갈아 나간다.(배고픔의 해결 - 육식 식성) 화가 난 금백주는 땅 가르고 물 갈라 살림을 분산하자고 고함을 친다. (이혼 - 가름) 소로소천국은 부인과 가족을 떠나 고부니모를로 내려가서 강진역의 딸을 첩으로 얻고 수렵 생활을 한다.
(돝오름에서 보이는 비자림)
(토착신과 재혼-마을의 분리) 일곱째 아들이 자라서 일곱 살이 되니 아버지 무릎에 앉아 수염을 잡아당기고 가슴팍을 치고 하니 불효하다고 하여 무쇠설갑(鐵函)에 담아 동해 바다에 띄워 버린다. (아들의 불효 - 추방) 석함은 동해 바다 용왕국 산호수 가지에 걸려 용왕의 셋째 딸과 혼인하였는데 너무 식성이 과다하였기 때문에 용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혼인→식성 과다→추방) 강남국에 가 세변을 막고 도원수가 되어 제주도에 돌아온다.(난리 평정-귀향) 아버지에게 절을 하려 하니 아버지는 달아나 당신이 되고 어머니 금백주는 살 곳을 찾아가 산 설립, 물 설립하고 인간 백성들에게 수명장수, 오곡풍성, 육축번성, 농사설비 시켜 주라고 한다.(부자상봉 - 새 마을 형성 - 당신의 기능 획득) 자식들은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마을 단골들에게 낳는 날 생산, 죽는 날 물고 받는 당신이 되었다. (마을의 토주관-당신으로 좌정)"
송당리에는 본향당, 일뤠당, 산신당이 있다. 그밖에 소로소천국을 모시던 당의 20년 전에 폐당 되어 흔적만 당동산에 남아 있다. 송당 산신당과 일뤠당은 체오름 옆에 있는데, 3년 전 문무병 선생과 답사 차 찾았을 때에는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산신당은 자연석을 허리 높이로 둥그렇게 둘러쌓아 제장을 마련하고 팽나무를 신목으로 삼고 있으며, 거기다 넓적한 자연석을 놓아 제단을 만들었다. 10여m 떨어진 곳에는 일뤠당이 있는데, 일뤠당은 7일, 17일, 27일에 찾는 당을 말한다. 피부병과 육아를 관장한다는 당신(堂神)이 머무르는 이곳은 달리 담을 두르지 않고 신목인 참나무만 있다.
그러기 때문에 평상시에 소나 말을 찾아달라고 빈다거나 아이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빌 때는 산신당이나 일뤠당을 찾고 마을제와 같은 제의를 치를 때만 여기서 치르는 것이다. 여기 백주또와 소로소천국 사이에서 태어난 여러 자식들은 북제주군 동부지역 여러 마을 당신(堂神)이 된다. 나는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이나 이런 것을 미신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오해가 없도록 "이는 옛 사람들의 우주관에 따른 원시 형태의 종교이며, 선조들이 삶을 살아온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민속 유적으로 이해하도록" 설득한다.
(비자림에서 보이는 돝오름)
▲ 돝오름에 부는 바람
돝오름(돛오름, 비지오름, 猪岳)은 북제주군 구좌읍 송당리 산3번지와 평대리 산16번지 일대에 위치한 오름으로 비자림과 이어져 있다. 그 재원을 보면, 표고 284.2m, 비고 129m, 둘레 2,410m, 면적 430,425㎡, 저경 845m인데 옆에서 바라보기엔 그리 크지 않아 보이나 올라보면 꽤 풍만한 몸체를 가진 오름이다. 산정부에서 북동쪽으로 얕게 골이 패어 있는 원형분화구의 깊이 45m 되는 곳도 있고, 화구 둘레만 약 1km 정도 된다. 경사가 완만한 화구사면은 둥근 모양을 띠면서 그 안에는 풀밭을 이루고, 오름 기슭에는 해송과 삼나무가 조림되어 숲을 이루고, 비자림 쪽으로는 비자림의 뒤를 이을 후계림을 조성하기 위해 새로 6,100본의 비자나무를 심어놓았다. 비자림 숲이 수명이 다할 때를 대비해서 북제주군에서 벌이는 사업이다.
지난 토요일 이 오름에 왔을 때는 오름 등성이와 분화구 곳곳에 꽃향유가 활짝 피어 오름 전체가 보랏빛이었는데 한 이틀 비가 오고 기온이 내려서인지 언제 그랬냐 싶게 꽃이 벌써 다 져버렸다. 북쪽 사면 위로는 하늘에 별처럼 빛나던 물매화가 보기 좋았었는데 그것 역시 몇 송이 안 남았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의 계절이 변화란 이렇게 빠른가 보다. 들꽃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찬서리에 변하지 않고 버티어낼 재간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중에도 그걸 이기고 꿋꿋이 살아남은 몇 포기의 물매화, 자주쓴풀, 용담, 산국이 사람들에게 예쁘다고 찬사를 받는다. 바람이 너무 세차서 정상에 있질 못하고 남쪽으로 좀 내려와 앉아서 막걸리와 커피 파티를 벌이고 내려왔다.
(비자림의 단풍)
▲ 비자림 숲에 빛나는 단풍잎
돝오름에서 내려와 비자림 후문으로 통하는 긴 골목길을 걷는다. 차는 미리 비자림 주차장으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계획된 코스다. 그러나, 이게 왠 일인가? 비자림에 면한 길섶과 울타리의 식물들을 다 베어버렸다. 나의 좁은 소견에는 영 마땅하지가 않다. 비자림은 비자나무도 그렇지만 오랫동안 보호되어 온 희귀식물과 식생이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생각되는데, 바닥의 잡목과 풀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베어버리지 않아도 이제까지 잘 자라지 않았는가? 지난번에 왔을 때는 그 울타리에서 잘 익은 남오미자도 찍을 수 있었고, 선밀나무 열매도 찍을 수 있어 다음에 다른 사람이 찍게 하려고 열매를 남겨놓았는데….
천연기념물 제374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는 비자림은 448,165㎡의 면적에 300∼600년생 비자나무 2,880여 그루가 밀집하여 자생되고 있는 평지림(平地林)이다. 나무의 높이는 7∼14m, 직경은 50∼110㎝ 그리고 수관폭은 10∼15m에 이르는 거목들이 군집한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비자나무 숲이다. 전라남도 쪽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커다란 비자나무가 몇 그루 있고, 녹우당(綠雨堂)이 있는 해남의 윤선도 옛집이 있는 곳에 500 그루 정도의 비자림은 있지만 이렇게 커다란 거목의 군락은 이곳이 유일하다. 게다가 나도풍란, 풍란, 콩짜개란, 흑난초, 비자란 등 희귀한 난과 식물의 자생지이기도 한 곳이 아닌가?
비자나무에 섞여 있는 팽나무나 천선과나무, 비목나무, 예덕나무, 무환자나무, 말오줌떼 같은 것들이 낙엽이 지면서 그 아래에 있던 단풍나무가 햇볕을 받고 붉은 색을 띠기 시작한다. 더러는 벌써 빨갛게 물든 것도 있고 누렇게 변한 것도 있다. 학술 조사 결과를 보면, 목본식물 111종이 생육하고 있고, 상록수종이 16종, 낙엽수종이 95종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런데, 저렇게 마구 베어버리면 그것들이 제대로 배겨날는지. 새 밀레니엄 나무라는 제일 나이 많은 고목이 있는 곳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비자나무의 삼림욕은 혈관을 유연하게 하고 정신적, 신체적 피로회복과 인체의 리듬을 되찾는 자연 건강 휴양 효과가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비자나무 열매인 비자는 구충제로 많이 쓰여졌고, 나무는 재질이 좋아 고급가구나 바둑판을 만드는데 사용되어 왔다. 고려시대부터 제주도의 비자나무와 그 열매가 공물(貢物)로 진상되었으며, 비자는 약용으로 과세의 대상이 되었다. 이곳은 상록수림이어서 언제 찾아도 그 울창함을 맛볼 수 있으며, 600∼7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야영장 시설과 200∼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이 있어 수학여행 철에는 너무 인기가 있어 연말에 계획을 세울 때 예약해야 한다.
(다랑쉬 굴 앞에 민예총에서 세운 표지석)
▲ 끝나지 않은 4. 3의 상흔 - 다랑쉬 굴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0월 31일 제주도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4. 3에 관해사과를 한 바 있다. "존경하는 도민과 유족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 55년 전 평화로운 이곳 제주도에서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중 하나인 4,3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입었습니다. 저는 이번 제주방문 전 4. 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 각계인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2년여의 조사를 통해 의결한 결과를 보고 받았습니다.
위원회는 이 사건으로 무고한 희생이 발생된 데 대한 정부의 사과와 희생자 명예회복 그리고 추모사업에 적극적인 추진을 건의해왔습니다. 저는 이제야말로 해방 직후 정부수립 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불행한 사건의 역사적 매듭을 짓고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주도에서 1947년 3월1일 기점으로 해서 1948년 4월3일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리고 1954년 9월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됐습니다. 저는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목을 빕니다. 정부는 4.3평화공원 조성, 신속한 명예회복 등 위원회의 건의사항이 조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다랑쉬굴 있는 곳에서 나가는 사람들과 대 숲 너머 다랑쉬오름)
해발 170m의 중산간에 자리잡은 다랑쉬 마을에 들어서면 4. 3 당시 '잃어버린 마을' 표지석이 있고, 늙은 팽나무와 10여 곳의 대나무 숲, 집터, 우물터 그리고 깨진 그릇 조각들을 볼 수 있다. 팽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 300m 정도 동쪽으로 난 길을 들어가면 풀이 우거진 곳에 시멘트로 입구를 막아 버린 다랑쉬굴이 있다. 제주의 곳곳에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948년 12월18일 9살 철부지서부터 50대 아주머니까지 민간인 11명이 이 굴에서 제9연대 2대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발견 당시 이 굴의 입구는 직경 60∼70㎝로 좁고 낮아 한사람이 겨우 엎드려서 들어갈 수 있었는데, 굴 안에는 물허벅과 그릇, 어느 아주머니의 머리에 꽂혀 있던 비녀, 허리띠, 고무신, 횃불통, 무쇠솥, 놋수저와 그릇 등이 유골과 함께 있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골은 당국에 의해 화장(火葬) 후 바다에 뿌려졌다. 대나무 우거진 골목길을 들어서서 밭구석을 돌아 들어간 현장에는 민예총에서 세우 표지판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조금 우묵하게 들어간 굴 입구는 잡초만 무성하게 그 날의 아픔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갖고 간 막걸리와 밀감을 올리고 희생자의 명복을 빌었다. 제일 뒤에 남아 어수선한 자리를 정리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바닷가에 위치한 생개납 돈짓당의 모습)
▲ 신앙 유적 - 생개납 돈짓당
해안도로를 달리다 종달리 포구 북쪽 바닷가에 가보면 북쪽으로 배 모양의 전망대가 보이는 곳에 조그만 바위를 의지해 생개납 돈짓당이 있다. 바다 쪽으로 돌출해 있는 곳이지만 묘하게도 우묵사스레피나무 한 그루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훌륭하게 신목 구실을 하고 있다. 지전과 물색이 많이 걸려 있는 좁은 공간에는 제단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지만 방금 다녀갔는지 단감과 밀감이 싱싱한 채로 있다. 장난을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먹다 남은 것을 얻어먹는 것은 죄가 안 된다고 하나를 들고 옷에 쑥쑥 닦고는 으적으적 깨물어 먹는다. 다시 하나를 꺼내 옷에 문질러 닦고는 옆에서 침을 삼키는 어린이에게 내미니, 얼른 받아드는 걸 그 어머니가 뺏아 다시 원 자리에 놓아버린다.
이 신당은 주로 어부와 해녀들이 다니는 당이다. 제주도에는 미역을 따거나 전복을 캐는 곳을 '바다밭'이라 하며, 바다로 가는 포구에는 바다를 지켜주는 해신당이 더러 있다. 밤에 꿈자리가 사나웠다든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아무래도 켕기면 출어를 하기 전에 이곳에 들려 빌고 가는 것이다. 제주에서는 포구를 '개', '성창' 또는 '돈지'라고 부르며, 이에 따라 바닷가의 당을 '개당', '돈짓당' 또는 '해신당'이라고 부른다. 해신당에는 대개 어부를 지켜주는 선왕신과 잠녀들을 지켜주는 요왕신을 모신다. 어부들은 해상의 안전을 위하여 초하루와 보름날 새벽에 당에 가서 선왕을 위한 당제를 모신 다음, 배에 가서 풍어를 위한 뱃고사를 지낸다.
(새로 쌓아놓은 종달연대 모습)
▲ 고증 없이 새로 만든 종달연대
1996년 7월 18일자로 제주도기념물 제23-16호 지정된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 451-2번지에 있는 종달연대의 모습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복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축(新築)이라고 할 정도로 돌을 깎고 다듬어서 미끈하게 뽑았다. 표지판을 따라 돌아 들어 간 동산에는 친절하게 계단도 놓여 있다. 원래 수산진에 소속되었던 종달연대(終達煙臺)는 그 돌을 어디다 써버렸는지 모르지만 기초석(基楚石) 몇 개만이 남아 있었는데,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동쪽으로 직선거리 9.2km 지점의 오소포연대와 서쪽으로는 입두연대와 교신하였고, 수산진 소속 별장 6인, 봉군 12명이 배치되었었다.
제주도의 방어시설은 조선시대 초기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주성은 탐라국시대부터 있었지만 대정성과 정의성을 비롯한 3성이 새로 축성되었고, 9진, 10수전소, 25봉수대, 38연대가 이 시기에 설치되었다. 연대는 바닷가의 높은 지대에 석축 사면으로 쌓아 상단 중앙에 대(봉덕)를 만들어 사용했었다. 봉수와 연대는 각각 별도로 신호를 주고받았는데, 평상시에는 1개, 황당선이 출현하면 2개, 가까운 곳에 이르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접전할 때는 5개의 연기 또는 불꽃을 피워 연락했다. 연대에 올라 사방을 보며 왜 이런 것을 복원하면서 비교적 가까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협자연대를 보고 만들지 않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
(김영갑갤러리 앞마당의 억새)
▲ 제주에 반한 사진 작가 - 김영갑갤러리
20여 년 동안 제주도에 살면서 폐교된 삼달국민학교에 지난해 갤러리를 연 사진작가 김영갑씨(48). 그의 홈피 '두모악(http://www.dumoak.co.kr/)'에 들어가면,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뜬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이 드디어 여러분 앞에 선을 보입니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두모악은 폐교였던 옛 삼달초등학교를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김영갑 님이 20년간 공들여 찍어오신 제주도 사진들이 가장 어울리는 자리를 찾은 것이 가장 기쁜 일이지요. 길가의 돌담이 마술처럼 운동장 안쪽까지 구불구불 들어와 정원을 이루고, 흙으로 빚은 토우와 층층 돌인형들도 산수국 틈에 숨어 앉아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발길로 두모악의 돌길이 다져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첫 쪽에 '눈 뜬 장님들의 제주 여행'이라 제하여 제주의 참모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비웃고 있다. "중산간 초원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모두가 있다.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고 느낄 수 없는 별천지의 세계가 존재해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심하게 스쳐 지나간다. 문명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이들의 고정관념 때문인지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한다. 이곳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지만 사람들은 무관심하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맑고 투명하게 하는 고요, 평화, 적막함….
(갤러리로 들어가는 곳에 만들어 놓은 토우)
제주도에 눌러 지내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 처음 오는 사람도 만났고 일년에 몇 번씩 드나드는 사람도 만났다. 고향이 제주도인 사람도 만났고, 제주도에서 몇 년을 살다 떠난 사람도 만났다. 그들은 말했다. 바다가 있고 산이 있어 좋고, 섬 중에 섬이 있어 좋단다. 물도 공기도 감로수처럼 달콤해서 좋단다. 여름밤의 밤바다도 중산간의 안개도 좋단다. 달빛에 드러나는 초원의 환상적인 분위기도 칠흑의 어둠 속을 드라이브하는 맛도 모두들 좋단다.
처음 보는 사람이나 친지들이나 제주도 사진만을 고집하는 나에게 서울 생활을 포기하고 눌러 지낼 만큼 제주도가 좋으냐고 묻는다. 수 없이 받았던 질문이지만 나의 대답은 늘 궁색하다. 십 년 넘는 세월 나의 화두(話頭)가 되었건만 아직도 풀지 못했다. 제주도는 그만큼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로운 곳이다. 척 보면 제주도의 이국적인 풍광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겉으로 드러나는 풍광이야 몇 번 보면 싫증이 나겠지만 감추어진 아름다움은 볼수록 느낄수록 감칠맛이 난다. 뭔가 있을 것 같은데 그 맛을 알기까지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 맛은 볼수록 느낄수록 감동이 진하다."
마당 곳곳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돌무더기. 그 사이에 제멋대로 자란 억새도 자연스럽다. 화단에 위에 자갈돌을 쌓아놓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자세로 앉혀놓은 토우, 그러나 교실마다 전시된 그의 사진 작품 속에선 질서 정연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2년 전 '루게릭병'으로 더 잘 알려진 근육성 측삭경화증(ALS) 판정을 받은 뒤,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하는 그. 너무 가늘어져버린 그에게 인사하는 것이 안스러워, 악수하면서 꼭 눈물이 날 것 같아 먼발치서 바라보고 그의 두 번째 사진 해설집 '삽시간에 붙잡힌 한라산의 황홀' 한 권을 사고 도망치듯 나왔다.
(사진 해설집 '삽시간에 붙잡힌 한라산의 황홀'에 나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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