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 오후 3시 반--.
탐라순력도 '모슬점부' 취재차 강 화백과 들른 모슬포.
△ 모슬포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에 있는 포구.
제주도 남서쪽 끝에 있으며 배후에
모슬봉(187m)·가시악(加時岳:123m)을 등지고 있는 남서부 해안은 암석해안 또는 암초(岩礁)로 둘러싸여 천연의 방파제가 되고 있다. 포구는
중앙에 돌출한 작은 반도에 의하여 항구가 좌우로 양분된다. 포구는 항내가 좁을 뿐더러 배후지(背後地)를 제주와 서귀포에 빼앗겨 어항으로서만
발전해 왔다.
조선시대에는 수군방호소(水軍防護所)·중수전소(中水戰所)가 설치되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원래 모슬포는 대정의 외항(外港) 겸 어항으로 발달해왔으나 지금은 관광지로서 활기를 띠고 있다. 특히 모슬봉·송악산에서 남해를 바라보면 바닷물에 비치는 어선과 섬, 밤바다에 불야성을 이루는 어화(漁火), 발 밑에 형제암(兄弟岩)·가파도(加波島)·마라도(馬羅島)까지도 한눈에 볼 수 있다.
나 할 말조차 앗기면 모슬포에 누우리라
뭍으로 가지 않고 물길 따라 모슬포 고요가
되리
슬픔이 손 뻗어 가리킨 곳
모슬포 길들은 비명을 숨긴
커브여서
집들은 파도 뒤에서 글썽인다네
햇빛마저 희고 캄캄하여
해안은
늙은 말의 등뼈보다 더 휘어졌네
내 지루한 하루들은 저 먼 뭍에서
진행되고
나만 홀로 빠져 나와 모슬포처럼 격해지는 것
두 눈은 등대 불빛에
빌려주고
가끔 포구에 밀려드는 눈설레 앞세워 격렬비도의
상처까지
생각하리라
---모슬포 가는 까닭 / 송재학
황조기(위)와
백조기(중)
그리고 존단이(아래)
가파도와 마라도로 통하는 항구
그리고 등대---.
갈매기 날고--.
어업 전진기지
어획을 올리는 데 획기적인 공헌을 한
수발(水發) 김묘생(金卯生) 공덕비(功德碑)
우리가 가끔 점심을 먹는
부두식당과 그 옆 자리물회로 소문난 항구식당
폭풍 때문에 메어놓은 배
출발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등을 단 어선들---.
그리고
왜구들로부터 신영물을 지킨 다섯 분을 기리기 위한 오좌수 행적비.
△ 오좌수행적비(五座首行蹟碑)
한라산 비켜 앉아 거센 바람받이인 대정고을 모슬개. 이 바닥은 예로부터 의기(義氣)의
사나이들을 길러내고 그들에 의해 횃불 드높이 올랐던 고장이다. 앞에 가파도와 마라도가 자리잡아 전복 등 해물이 풍성한 이 고장 바다는 고려 이후
줄곧 외침에 시달려 왔으니 그 주범(主犯)은 왜구(倭寇)들이었다. 1886년(고종 23년) 이 인근 바다를 침범하여 해산물을 채취해가던 방자한
왜구들은 여기 신영물을 먹을 물을 길어가면서 그 뿐 아니라 짐승과 물건도 노략질하고 부녀자를 농락하기까지 했다.
이에 피끓은
청년 이만송(李晩松)과 이흥복(李興福), 정종무(鄭宗武), 이성만(李成萬), 이성일(李成鎰) 등 다섯 젊은이가 보다 못하여 일어나 그들과
싸우다가 그들이 가진 환도(還刀)에 이만송의 머리가 잘리는 참변(慘變)을 당하여야 했다. 그 후 이 사건은 조정에 알려져 사망한 이만송의 아들
이평원(李平元)과 함께 싸웠던 네 사람에게 좌수(座首) 벼슬을 하사하니 이것이 '오좌수(五座首)'가 된 내력이다. 이 때 함께 싸웠던 이름
모르는 하인에게는 벼슬 대신 30냥의 하사금이 내려졌다고 전해온다. 바다는 유구히 푸르고 신영물은 오늘도 솟아오르는데 같은 땅을 이어 사는
젊은이들의 귀감(龜鑑)이 되는 선인들의 의기를 기려 여기 돌 하나를
세운다.
1995년 6월 지은이 오성찬 글쓴이 김태윤
-- 광복 50주년 모슬포청년회의소 창립 21주년 기념
'향토문화 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라도 기행(2) (0) | 2004.06.30 |
---|---|
마라도 기행(1) (0) | 2004.06.28 |
탐라국 입춘 굿놀이 안내 (0) | 2004.02.03 |
늦가을의 정취를 찾아서 (0) | 2004.01.20 |
저 맑은 가을 하늘을 누가 가리랴 (0) | 2003.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