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금년에는 저 떠오르는 태양처럼

김창집 2004. 1. 20. 16:38

 

             □ 2004년 1월 1일 목요일 흐린 후 맑음

 

 ▲ 처음 출발부터 불안하기는 했으나 오름엘 다니기 시작하면서 새해 첫날이 되면 거르지 않는 행사가 있다. 첫 일출을 맞으러 오름으로 가는 일이다. 번번이 해를 못 보고 돌아오는 일이 허다했지만 그러기에 더욱 새로운 태양을 기다리는 일이 절실해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6시에 모여 가기로 계획이 된 터라 관심은 일기예보에 집중되어 있었다. 12월 31일 서울에 있는 아이들의 집에서 아침을 맞으며 TV 예보를 지켜보았는데, 새해 아침은 전국 어느 곳에서든 일출을 보게 되리라고 했다.  

 

 고무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한 해를 정리하며 보신각 타종 실황 중계를 보고, 오름 홈페이지와 칼럼에 새해 인사말을 올리고 나니, 벌써 새벽 2시다. 배가 아프다는 어머님께 약을 먹여드려 눈을 붙이는 것을 확인하고 잠에 든 때가 4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전화가 울리기에 눈을 떠보니 5시 25분이다. 서둘러야 했다. 우선 어머님께 식사를 먹여 드리고, 여러 가지를 보살핀 뒤 씻고 나니, 5시 50분. 두유 하나 마시고 뛰어 나갔다.

 

 모두 모여 설레는 마음을 누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옆에 세우는데, 조수미 공연 갔다가 잠을 설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 차가 가야 한다고 했다. 차를 끌고 나와 네 분을 태우고 앞장섰는데 뒤에서 전화다. 차의 오른쪽 뒷바퀴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옆에 세우고 봤더니, 과연 그렇다. 차가 너무 더러워 서울 가기 전에 바쁜 시간을 쪼개어 세차도 하고 기름도 채워 놓았는데…. 게다가 스노우 타이어로 교체한 지도 2주 정도밖에 안됐지 않는가? 

 

 같이 탔던 변 전 총무가 가서 차를 가져오고, 나는 짐을 내리고 골목길로 들어가 안전한 곳에 차를 세운 후 돌아와 차를 탔다. 구 박사가 불안한지 안 가겠단다. 새해 첫날 사람들도 만나 새해 인사도 마쳤고 구름이 꽉 끼어 있어 해를 볼 가능성도 적고. 더구나 손님 만날 일도 있다고 한다. 차를 타고 가며 내 탓인 것처럼 미안했으나 본인의 말을 믿기로 했다. 새해 첫날 아침 첫 출발부터 무언가 삐걱거리는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새해 첫 일출을 맞으러 가는 마음 6대의 차 중에 맨 뒤에 출발했다. 차가 시내를 벗어나려는데 꽤 밀려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새해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맞으러 간다. 생활의 여유가 있어져서 그런 점도 있으나 10여 년 전부터 구정 설을 쇠면서 생활 패턴이 바뀌어진 때문이다. 사실 제주시 서쪽에 위치한 마을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편 1940년대부터 양력설을 쇠었다. 비교적 독립심이 강한 동쪽에서는 그렇게 막는 데도 음력설을 고수했는데, 부끄럽게도 서쪽은 그걸 지키지 못하고 해방을 맞고서도 관행처럼 양력을 쇠다가 음력설이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바꾸었다. 

 

 일출에 관심이 많아진 것은 성산 일출봉에서 행사를 가지면서부터다. 12월 31일 오후부터 계속해서 행사가 열리기 때문에 아침부터 몰려 저녁이 되면 차도 진입할 수 없다. 그런 까닭으로 일출을 볼 수 있는 여러 오름에서도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우리 오름 모임에서는 새해 첫날부터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소란스럽게 일출을 맞고 싶지 않아 높은오름, 대왕산, 두산봉 등을 전전하다가, 4년 전부터 둔지봉에서 해를 맞고 있다. 어떤 때는 전혀 가망이 없는 걸 알면서도 오름 정상에서 비를 맞으면서 해뜨기를 기다린 일도 있다.

 

 새해 첫날 새로운 태양을 맞는 감동으로 소원을 빌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인가 보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이건만 이 날의 태양은 더 크고 찬란하리란 희망을 갖고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일주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자동차 행렬이 이어지다가 함덕 해수욕장을 지나 중산간 도로로 접어들고 나서야 우리 차만 따로 떨어졌다. 작년에는 선흘에서 모여서 갔지만 올해는 현장까지 직접 가기로 했기에 늦게 출발한 우리만 외톨이가 된 것이다. 

 

 16번 도로에 진입하자 다시 차들이 보인다. 마을을 곧 벗어나 만장굴 간판이 있는 곳에서 진입해야 했는데, 어두워서 길을 놓치고 16번 도로로 계속 진행하여 거의 송당리까지 가서 상덕천을 돌아 하덕천으로 내려왔다. 사람의 습관이란 묘한 것이어서 잘못된 줄 알면서도 쉽게 인정하러 들지 못하고 "이왕 이렇게 된 것 조금 돌아서 가지 뭐."하다가 잘 못 된 길로 빠지는 수가 많은데,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일행 중 제일 늦게 도착한 시각이 06시 50분. 모두 올라가고 우리밖에 안 남아 서둘러 오름을 오르는데 멀리 능선에서 손전등 불빛이 어른거린다. 날이 이미 밝았는데, 동쪽 하늘은 시커먼 구름으로 덮이어 쉽게 해의 모습을 보여줄 가망이 없다. 어느 회원이 정성스레 가져온 보리빵이 식을까봐 상자째로 가슴에 꼭 안고 단숨에 올라가는데, 이른 아침부터 산불감시 초소 아저씨가 나와 있다. 불조심하라고 당부하길래 걱정 마시라고 이르고는 동쪽 등성이로 가서 일행과 조우하였다.

 

 1년 새 소나무가 크게 자라 시야를 가리는 곳도 있다. 바람을 피하여 자리를 잡는데, 사진을 찍는 분들은 조금 높은 곳에다 삼각대를 세우고 대기중이다. 기온은 작년보다 차지 않는데 해가 기대에 부응할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일출봉은 위치를 가늠해서 봐야 겨우 그 윤곽이 드러난다. 다만 검은 구름 띠를 벗어난 곳 다랑쉬오름 옆으로 조금 구름이 밝게 보이는 곳이 있어, 2∼30분 후에 해가 그곳에 올라왔을 때라도 밝게 비춰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세히 보니 다랑쉬오름 위로 패러그라이더 하나가 떠서 비행 중이다.

 

 07시 37분. 구름이 없다면 지금 막 해가 바다 위로 얼굴을 내밀 때다. 낙심한 사람들은 떡이나 차를 나누어 먹고 있다. 때맞춰 초소 아저씨가 와서 오늘은 해를 보기 어렵겠다고 한다. 이 때를 놓쳐서는 안되겠다 싶어 모두 가까이 다가서서 조용히 얘기 듣기를 권했다. 며칠 전부터 오늘을 기다려, 추운 데도 잔뜩 기대하고 나온 분들과 새벽잠을 설치고 눈을 비비며 나온 어린이들에게 실망을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까지 몇 차례 들어온 회원들에게는 감동으로 다가갈지 의문이지만. "오늘 우리는 2004년 새 태양을 맞으러 어렵게 이곳에 왔습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지금 이 시간 구름 저편에는 해가 둥실 떠올라 있습니다. 우리 눈에 안 보여도 우리는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는 데도 계시다고 믿듯이, 불교인들이 부처님은 마음속에 있다고 하듯이, 우리는 떠오르는 해를 우리 마음속에 담고 갑시다. 해가 떠오르는 순간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자신과 가족의 소원을 빌고 나서 작년 암담했던 나라가 금년에는 좋아지기를 빕시다. 각자가 좋아하는 색을 칠하고 마음속에 해 하나씩 그려 품고 갑시다."

 

 

 

▲ 올해는 나라의 경제가 나아질 것 같아 기도하는 분위기의 1분 여가 지나고, 내미는 차를 받아 홀짝이며 동쪽 하늘을 응시하는데 신기하게도 눈에 들어오는 검은 구름 속의 빨간 점. 나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점점 뚜렷해진다. 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분들의 입에서 탄성이 나오기 시작한다. 일식(日蝕) 할 때 그을린 유리 속으로 보이는 것 같은 빨간 점은 점점 둥글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완연한 원(圓)이 되었다. 어느 날 꿈속에서 보았던 태양이었다. 

 

 이제 얼마 안 가 위에 구름이 좀 벗겨진 곳에 이르면 빛을 발하리라는 확신을 받고부터는 모두들 감동의 도가니였다. 저 정도면 10여 년 기다려왔던 태양으로도 훌륭한 것이 아니냐고 사진을 찍으며 환호하였다. 6년 전 2월에 정동진에서 구름 한 점 없는 일출을 보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이었고 밋밋한 것이었는데 비해 이번은 구름 속에서 천천히 확신을 주며 피어오르는 것이 더 감동을 준다. 한 동안 웃음꽃을 피우며 축배를 들었다. 올해 우리 나라의 경제도 처음에는 암담하겠지만 차차 나아지리라는 전망도 나왔다. 모두들 싱글벙글 웃으며 이제는 이 둔지봉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농담을 하면서도 여유가 있다.

 

 내려오면서 산지기 아저씨와 악수를 나누고 자꾸 뒤돌아보며 연신 셔터를 눌렀다. 소나무에 걸린 태양은 한 떨기 찬란한 꽃이었고, 너울거리는 억새 사이로 보이는 태양은 내년을 기약하며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바쁜 몇 사람들을 제외한 회원들은 내년에 올라갈 오름에 가보자고 선흘 민오름으로 향했다. 삼나무 사이로 터진 길을 단숨에 올라보니 사람이 올라왔다 간 흔적이 역력하다. 여기서는 태양이 어떻게 보였을까? 주변 삼나무들이나 어지러이 자라난 잡목들이 시야를 조금 가리기는 하겠으나 여러 오름들이 빚어내는 곡선 사이로 솟아오른 태양도 멋있었을 듯 싶다. 이른 점심을 먹은 회원들 중 8인은 아침의 감동을 삭일 수 없어 다시 오름으로 향했다. 아라동 세미오름과 산천단의 제단을 품고 있는 소산오름을 오르면서도 그 희열은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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