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사리 - 아직은 너무 일러
* 사려니오름 중심부
어제 다섯 개나 되는 오름에 올라서 싫증이 날 법도 하건만, 오름에 미친(美親) 자들은 식목일에도 열 명이나 모였다. 윤이월 날씨여서 그런지 아직은 쌀쌀한 편이다. 눈치를 보니, 어제 북군 쪽으로 돌아다녔으니, 오늘은 저 따뜻한 남쪽나라가 그리운 눈치다. 무언가 겨냥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아 얼른 간파하고 남원읍 쪽으로 가서 고사리라도 한 줌 캐자고 사려니를 제안하니 모두 즐거워했다.
남조로 물영아리를 거쳐 충혼묘지를 지나 '고사리 축제장' 못 미쳐 5.16도로로 이어지는 산록도로 신축 현장으로 가는데 다리 너머에 보수 공사가 한창이다. 앞서 간 차로 전화를 걸었더니 조금 뒷걸음질 친 후 사잇길로 접어들어 민오름으로 오라 한다. 알려 준 길로 접어드니, 곳곳에 고사리 캐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할 고사리는 없다. 한창 때에는 곳곳에 팬 고사리가 보여야 하는 게 정상인데 중산간이어서 그런지 아직은 이른 모양이다.
* 난대림연구소 간판
민오름에서 거린악 길로 가는데 이어지는 부분이 비포장이다. 내려서 차가 온전하게 지나가기를 바라며 끔찍했던 지난날의 거린악 등반길을 생각했다. 아무리 아는 길도 지도를 좀 보고 다녀야 한다는 부회장이 조언을 받아들여 앞으로 지도와 나침반쯤은 갖춰야겠다고 다짐한다. 정 안 되면 오름회에서 공동으로 구입해 갖고 다녀도 좋을 듯하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기로 했다. 물론 조금 더 차를 타고 갈 수 있겠지만 오름에 왔으면 좀 걷는 것도 좋으니까.
* 한창 물이 오르는 단풍나무
△ 주 사업이 무엇인지 모를 임업 시험장
이곳에도 역시 고사리는 솟지 않았다. 얼굴을 조금 내민 두릅나무 작은 순과 달래들만 인사를 하고 고사리는 아직 나올 기색이 없다. 가끔 여기서 고사리 두어 줌씩 캐는 곳이지만 오늘은 고사리는 포기하자고 하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산길을 걷는다. 사람은 욕심을 버려야 건강해지고 마음 편한 법이기에….
한 때 소가 제 값을 받을 때 목장 관리사가 들어섰던 곳이었는데, 이제는 집도 거의 허물어지고 감나무나 밤나무만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얼마 전 새로 들어선 집과 간판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림 산업연구소'라 적혀 있어 집에 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더니, 멸종 위기의 피뿌리풀 다량 번식을 시도하였고, 죽절초 자생 군락지를 발견해냈다고 되어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고 해두지만 피뿌리풀이 오름에 어느 정도 퍼져 있으며, 죽절초를 눈으로 키워온 사람이 누군데.
* 독특한 모양을 한 산딸기나무
늘 올랐던 사려니 남쪽 봉우리는 그만 두고 오늘은 바로 사려니오름 삼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바로 특이한 나무를 발견했다. 산딸기 종류임은 분명한데 찔레나무 형상에다 해당화의 잎을 단 나무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솎아낸 삼나무 아래에는 별 나무가 보이질 않는데 고사리가 하나 튼실하게 솟아있다. 그럼 삼나무가 주종인 이곳에서 어떤 난대림을 연구하고 있단 말인가? 아까 건물 옆으로부터 설치해 놓은 모노레일은 무엇을 위한 것이고?
* 숲에서 올려다 본 삼나무
▲ 마지막으로 꽃을 피워낸 춘란 한 송이
가끔 보이는 금새우란은 노루가 뜯어먹은 흔적이 역력한데도 새순을 힘차게 뽑아 올리고 있다. 얼마 전에 뜯어먹었는지 어린 노루 똥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다. 태풍 매미가 할퀴고 간 자리엔 삼나무가 어지러이 누었는데 그걸 피해가다가 막 피어나는 남산제비와 앙증맞게 꽃을 피운 작은 천남성과 마주쳤다. 이곳 남원읍의 오름은 정상 능선을 따라 닭의 벼슬처럼 커다란 바위가 박혀 있는데, 그를 의지해 뿌리내린 구실잣밤나무와 가시나무 종류가 많이 쓰러져 볼 품 없이 돼버렸다.
그 나무들을 정리해 모두 잘라버리고 주위가 모두 노출돼 있는 곳에서 노루가 뜯어 먹어버린 춘란 두어 포기를 보고 지나치는데, 어렵사리 꽃을 피워낸 춘란을 발견했다고 소리친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오름에 처음 다니기 시작하던 10년 전만 해도 그렇게 흔하던 모습이 이제는 이 정도이니 자연이 파괴되는 속도를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 오랜만에 보는 춘란꽃(보춘화라고도 함)
키 큰 나무와 같이 자라던 잡목까지 다 베어버리니 햇빛이 많이 비치는 양지쪽은 온갖 봄꽃들이 향연을 벌인다. 노루귀도 아직 남아 있고, 남산제비는 물론 흰제비꽃도 여럿 눈에 띤다. 그밖에 온갖 제비꽃들이 난만하고, 현호색과 양지꽃이 피었는가 하면 고사리도 많이 솟았다. 정상에 이르면서 진달래꽃이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사무실 옆에 두 그루가 이곳에서 뽑아다 심은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 정상에서 만난 흰제비꽃
△ 사려니 -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능선 바위를 따라 양지쪽으로 쭉 베어버린 숲을 보니, 5공 무렵 장발 단속하며 밀어버린 머리가 떠오른다. 이곳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베어버린 저의가 무엇인지? 혹 이승악처럼 관광객을 의식해서 쉼터나 전망대를 만들려는 건 아닌지? 이곳에서 바로 모노레일을 깔아놓은 것도 그렇거니와 너무나 넓은 면적에 꽤 쓸만한 동백까지 싸그리 베어버린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여기가 어딘가? 여기는 국가에서 지정해놓은 임업연구원이며 국립산업과학원 난대림 연구소가 아닌가? 근래 들어 남제주군에서는 여러 오름을 공원화 하여 길을 만들고 여러 가지 운동 시설을 해왔다. 마을 옆에 있는 오름은 이해가 가는데 산 속 깊숙이 박혀 있는 이런 오름까지 꼭 그렇게 해야 하는지 원.
* 정상에 휘드러지게 핀 진달래
쑥떡과 오이, 인동술까지…. 좋아하는 것을 앞에 두고서도 영 신이 나질 않는다. 아까운 오름을 이렇게까지 망쳐 놓은 것을 보니,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거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앞으로 생태 관광이 각광 받을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데, 여길 이렇게 망쳐 놓아서 어쩔 것인가? 하긴 도지사가 한라산에 케이블카를 놓지 못해 안달인데 더 말해 무엇하랴? 가파른 모노레일을 따라 내려오면서 이 사려니오름이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생각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 내려오면서 본 사려니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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