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가을 바람 속 오름 풍경

김창집 2005. 11. 1. 16:25

여절악, 병곳, 번널, 붉은오름 답사기(2005. 10. 30.)

 

 

* 며느리배꼽 열매

 

♠ 10월의 마지막 산행

 

 오름오름회 회원들과의 산행(山行)을 연 3주 못 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서는데,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여덟시 경에 도착한 회원들은 맑은 하늘에 햇빛이 비칠 때 나와서 비에 대한 채비를 못했다고 황당해 하는 표정들이고, 지난 주 오름에 다녀오면서 이번 주는 단풍도 구경할 겸 쳇망을 가기로 했는데, 비가 와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의논 중이었다. 오늘 모인 일행은 15명. 딱 알맞은 숫자여서 3대의 차로 가면 되겠다. 

 

 일기예보에 없는 비라서 얼마나 더 내리겠냐고 강행하자는 측과 비가 안 오는 남원읍 쪽으로 가보자는 의견이 있어 한라산 국립공원 사무소가 있는 어리목으로 전화를 넣어 보니, 지금 비가 한창 온다고 등산하려면 비에 대한 채비를 갖추고 오라 한다. 우리가 가려던 곳은 바닥에 조릿대가 깔려 있어 설령 비가 개이더라도 바지와 신발이 다 젖어 여름도 아니고 고생할 거라고 차라리 남조로를 통해 남원읍 쪽으로 가서 비가 안온다면 물찻과 말찻을 오르자는 나의 제안에 모두 수긍하는 눈치였다.

 

 

* 자주쓴풀 꽃

 

 교래리를 지나면서 남쪽 하늘이 밝아 보이더니, 물찻오름 주변은 구름이 걷히고 정상에만 안개가 살짝 머물러 있다. 말찻오름 입구에 도착할 무렵엔 햇빛까지 비치더니, 차에서 내려 오름에 오를 차비를 하려니까, 다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그러자, 이렇게 억지로 말찻오름에 오를 이유가 있겠느냐고, 저 밝은 남원 해변 쪽으로 가서 풀밭오름을 오르자고 했다. 듣고 보니 백 번 옳은 말이어서 다시 차를 돌려 남원으로 향했다.

 

 숲은 젖고 칙칙하여 차라리 나지막한 풀밭 오름을 찾아가는 것이다. 남원 중산간 도로(16번)를 달리면서 주변을 보니, 대부분의 과수원에 감귤이 노랗게 변해 이젠 따도 될 만큼 익었다. 과수원이 아닌 나머지 밭엔 여름 감자와 무의 파란 잎사귀가 싱싱하다. 이곳 남원은 따뜻한 곳이어서 감자는 밭에 묻혀 있는 채로 겨울을 나고, 무는 싱싱한 잎으로 몸집을 키우면서 겨울을 날 것이다.  
 

 

* 미역취 꽃

 

♤ 여절악의 가을 채비

 

차에서 내려 여절악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마침 며느리배꼽이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채로 우리를 반긴다. 그 생김새와 다양한 색상이 너무나 재미있어 사진 찍기에 바쁘고 더러는 고향의 옛동산 같은 나지막한 여쩌리오름에 오른다. 가시덩굴과 잡목이 드문드문 나 있는 북사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목초지여서 기계로 말끔 베어버렸기 때문에 잔디밭처럼 매끈하다. 

 

 여절악(여쩌리, 예절이오름, 如節岳, 禮節伊岳)은 남원읍 신흥리 산18번지 일대에 자리잡은 표고 209.8m, 비고 50m, 둘레 1,445m, 면적 110,552㎥, 저경 462m의 오름으로 등성마루는 동서로 완만하고 낮게 이어지며, 남쪽으로 크게 벌어진 말굽형 굼부리를 이루고 있다. 한자 이름인 여절(如節)은 아무래도 음을 빌어 표기한 것 같은데 그 뜻은 알 수 없다.  

 

 사진을 찍느라 뒤늦게 산에 올라보니 산등성이에선 풀을 뒤져 자주쓴풀을 촬영하느라 야단이다. 동참하려다 옆에 있는 것에다 포커스를 맞췄다. 패랭이도 한 송이 외롭게 피었고, 미역취도 비에 젖은 노란 색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어디 좋은 꽃이 없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다시 일행이 몰려 있는 곳에 가서 머루를 찍는데 동참했다. 까맣게 익은 걸로 한 알 따 입안에 넣고 깨무니, 젊었을 때 애송(愛誦)했던 릴케의 '가을날'이 떠오른다.

 

 

♤ 릴케 - 가을날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주십시오.

 

마지막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어,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극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고,
완성으로 이끄시어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단 맛을 넣어 주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로 남아서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 떨어져 뒹굴면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 덜꿩나무 열매

 

♤ 병곳오름 가는 길

 

 바람이 거세게 불어 꽃을 찍는데 지장이 많다. 대신 억새는 한 쪽으로 쏠려 구름이 둥실 떠 있는 하늘을 배경으로 찍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곳에는 실한 억새가 없어 병곳오름에 가서 찍기로 한다. 내려오면서 까만 사스레피나무 열매도 찍고, 새빨간 덜꿩나무 열매도 찍었다. 보리수나무에 열매가 하나둘 붙어있는 것은 아직 익지 않았다. 대신 청미래덩굴 열매는 제법 붉은 빛을 띠었으나 사이사이 말라버린 것이 있어 아쉽다.

 

 계속 들어가면 다이너스티 골프장까지만 길이 있어 돌아 나와 군도(郡道)를 달린다. 이곳에 있는 밀감도 먹음직스럽게 익었다. 견물생심이라고 갑자기 밀감이 먹고 싶어하자 여(呂) 여사가 배낭에서 몇 알 꺼내 나누어준다. 가시리에서 제동목장으로 이르는 길섶은 여름 한철을 장식했던 코스모스를 베어버리고 유채씨를 파종하여 벌써 나물로 먹을 만큼 자라 있다. 이처럼 자연은 엄연한 질서에 따라 게으름 피우는 일없이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는데 내가 맡은 일은 큰 진전을 못 보고 10월을 보내고 있다. 아무래도 너무 벌려놓은 것 같아 어렵더라도 올해만 무사히 넘기고 내년부터는 여유를 갖고 작품도 써야지 하고 다짐해본다.

 

 

* 남오미자 열매

 

 시멘트 포장길로 접어들어 비스듬히 숲으로 들어서자 다 익어 가는 보리수 열매도 보이고, 작년에 보았던 말오줌때 열매는 빨간 껍질을 활짝 펴고 반짝이는 까만 열매를 달고 있다. 남오미자는 아직도 다 익지 않아 제 빛을 내지 못하는 것이 많다. 전에 그렇게 흔하던 머루는 줄을 걷어 버렸는지 간간이 보이는 것에 몇 알 붙어 까맣게 익었다. 다른 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주차하고 풀이 우거진 곳으로 난 길을 따라 앞장서 나간다. 

 

 이곳에서 분화구까지는 나무가 우거져 있어 그 꽃이나 열매를 보며 걷는 맛이 쏠쏠하다. 어느 해인가 이른 가을에 이곳에서 으름을 만난 적도 있고, 어느 해 초겨울엔 보리수나무 열매(제주에서는 '볼래'라 함) 잔치를 벌인 일이 있다. 그러나, 요즘은 오름 오르는 인구가 늘어나 제대로 익게 놓아두지를 않는다. 동백나무도 열매를 터트리고, 말오줌때, 고추나무, 서어나무, 사스레피나무, 덜꿩나무, 자귀나무, 식나무, 청미래덩굴, 꾸지뽕나무 등 혼효림 숲이 빈틈이 없다.           

 

 

* 물매화

 

♤ 병곳오름의 가을 풍경

 

 많은 사람이 다녀갔는지 길은 크게 나 있고 겨우 몸 하나 빠질 정도였던 것이 훵하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지만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하여 많은 사람이 즐길 걸 없애는 일인지 반성할 일이다. 분화구엔 억새에다 드문드문 보리수나무나 찔레나무, 청미래덩굴 같은 잡목이 자라나 가는 길을 방해한다. 억새 사이로 난 길섶에 잔대가 이슬을 머금은 채로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길은 가운데 커다란 무덤으로 나 있었는데, 유난히 높은 산담과 번듯한 석물(石物)로 장식되어 있다. 이 오름 분화구엔 꽤나 많은 무덤들이 산재해 있어 벌초 시기가 끝나면 여기저기 길이 뚫린다. 왼쪽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갔다. 생각만큼 억새가 우거지지 않아 실망이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 펼쳐진 정경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멀리 한라산이 구름에 가린 채 앉아 있고 물영아리와 여문영아리를 축으로 수많은 오름 능선이 펼쳐졌다.

 

 

* 잔대 꽃

 

 바람이 비교적 덜 부는 쪽으로 모두 둘러앉으려는데, 맞은 편으로 다른 오름 나그네 일행이 지나간다. 그 중에는 아는 얼굴들이 있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가져온 음식을 풀어 즐거운 새참 시간을 가졌다. 송편과 귤, 그리고 차를 나눠 마시고는 쥐포를 안주로 오래된 약주 밑술과 두견주(杜鵑酒)를 홀짝였다. 냉장고 안에서 푸대접받는 음식들도 이런 곳에 나오면 대환영이다. 

 

 병곳오름(벵곳오름, 안좌오름, 鳳歸岳, 屛花岳, 竝花岳)은 남제주군 표선면 가시리 산 8번지 일대에 남동쪽으로 등성이가 길게 뻗어 내린 오름으로 표고 288.1m, 비고 113m, 둘레 2,584m, 면적 482,903㎡, 저경 896m이다. 산체가 비교적 크고 가파른 사면을 이루고 있으며, 가운데 우묵하게 화구가 패어 북동사면의 골짜기로 이어진 모양이 원형 화구였다가 한쪽이 파괴되어 말굽형 화구를 이룬 것이다.

 

 

* 꽃향유 꽃

 

♤ 번널오름에 핀 꽃

 

 탐라순력도 '교래대렵(橋來大獵)'을 보면 번널오름은 판매동산으로 되어 있고, 이곳에 목사 일행이 앉아 드넓은 벌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냥을 구경하는 그림이 있다. 그만큼 오르기 쉽고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오름이다. 게다가 꽃이 많이 피어 금년만 해도 몇 차례 다녀갔다. 일행이 올라간 뒤에 물매화와 잔대를 찍느라 도랑에 주저앉아 물매화를 겨냥하여 바람 자기만을 기다렸다.  

 

 번널오름(番板岳, 번늘오름)은 남제주군 표선면 가시리 산 10번지 일대에 앉아 있는 오름으로 표고 272.3m, 비고 62m, 둘레 1,298m, 면적 129,713㎡, 저경 442m의 크기이다. 오름의 특징은 넓적하고 둥그스런 등성마루가 북쪽을 머리로 하여 남서방향으로 뻗어 내리다가 다시 올라와 허리가 잘록한 것이 말안장처럼 생겼으며, 안장모양으로 생긴 서남사면이 다소 얄팍한 형태이다. 

 

 

* 천남성 열매

 

 사스레피나무를 주종으로 잡목이 부분적으로 자라고 전사면이 풀과 새(띠)밭으로 덮인 가운데 청미래덩굴 같은 가시덩굴이 널리 분포하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 오름이 형세가 벌어졌다고 하여 '벌른오름'이 변한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널빤지'를 벌여 놓은 형상이라는 데서 '번널오름'이라고도 했다 한다. 판(板)이 '널'의 훈독자로 쓰인 것은 앞서 말한 탐라순력도에 보이는 '판매동산(板埋同山/널묻은동산)'에서도 확인된다

 

 언제 돌아왔는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내려오는 일행과 함께 가시리로 점심 먹으러 갔으나, 마침 기사들이 옛 가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체육대회를 했는지 두 식당이 만원이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찾는 사람이 적어 이곳의 돼지불고기와 순대국수가 구수해 자주 찾았는데, 요즘 손님이 많아진 뒤로 음식 맛도 없고 사람 대하는 게 영 개운치 않다. 왜 식당이 돈만 벌면 그렇게 되는지 참 아쉬운 생각이 든다.

 

 

* 사람주나무 단풍

 

♠ 붉은오름에서 본 단풍

 

 할 수 없이 성읍민속마을로 가자고 해서 부싯돌 식당으로 차를 달렸다. 멀 줄 알았는데 7∼8분만에 도착해보니,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그런지 손님이 거의 없다. 이럴 때 대접을 받는다고 서비스로 주는 좁쌀 막걸리로 모두들 입이 헤벌어진다. 이것저것 모자란 것을 요구하며 잘도 먹는다. 오후가 되어 풀잎에 물도 말랐을 테고 단풍 구경을 한답시고 붉은오름으로 갔다.

 

 가시리로 가는 것이 가깝다는 사람도 있고 동부관광도로로 가는 것이 가깝다는 사람도 있어 그래도 직선 코스가 안 낫겠느냐고 동부관광도로로 달린다. 붉은오름(赤岳峰, 赤岳)은 남제주군 표선면 가시리 산158번지에 위치한 오름으로 표고 569m, 비고 129m, 둘레 3,046m, 면적 585,044㎡, 저경 1,090m의 육중한 산체의 오름이다. 북사면은 정상부를 이루어 둥긋하고, 남사면 쪽으로는 침식되어 흘러내린 형태로 가운데에 원형 화구를 이루고 있다. 

 

 

* 사람주나무 단풍

 

 북사면은 둥긋하고 남사면은 굼부리가 우묵하여 등성마루에서 동서 두 등성이가 남쪽으로 뻗어 내렸다. 남동향으로 가슴을 벌린 자세인데 우거진 나무 때에서는 산체를 파악하기 힘들고 이중으로 굼부리가 형성되었다. 멀리서 보면 북사면 안으로 무덤이 하나 있어 독특하게 보이고, 돌다 보면 동쪽에 산담이 없는 무덤이 있어 오름 나그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삼나무 그늘 아래로 쉽게 능선으로 진입하여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았다. 아직 단풍은 붉은 물이 덜 들고 붉게 보이는 것은 거개가 사람주나무다. 사람주나무는 쌍떡잎식물 쥐손이풀목 대극과의 낙엽소교목으로 숲 속에 섞여 자란다. 그리고, 이 나무 열매에서 짠 기름은 아마인유 대용으로 한다. 아쉬운 대로 이 나뭇잎이 붉은 색에 혹하여 온 산을 휘젓고 다녔다. 오랜만에 마음 푹 놓고 즐긴 하루였다. 
 

 

* 아직 덜 물든 단풍잎

 

♬ 청산에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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