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라문화보존회 경남 남부 답사 (3)
2004년 2월 22일(일요일) 흐림
* 신라 문무왕 수중릉
♣ 울주 천전리각석(蔚州川前里刻石, 국보 147호)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207-8번지 태화강 물줄기인 내곡천 중류의 기슭 암벽에 새겨진 그림과 글씨이다. 아래, 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 : 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 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기마 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배 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 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비 때문에 다리가 넘쳐 못 간 울주 천진리각석 있는 곳
♧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蔚山大谷里盤龜臺岩刻畵, 국보 285호)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번지 반구대 암각화의 연대 추정은 신석기에서 청동기, 초기철기시대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청동기나 초기 철기시대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포경이나 작살 같은 그림과 함께 암각화를 그리기 위해 청동이나 철기 같은 도구가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1971년에 찾아낸 것으로 배, 고래, 거북, 사슴, 범, 멧돼지, 사람 같은 것이 200여 점이나 새겨져 있다. 원래는 물에 잠기지 않았지만 현재는 사연댐 속에 잠겨 있어 언양 자수정 동굴에 재현해 놓았다.
반구대 암각화는 중류의 암벽에 새겨져 있다. 평균 높이가 70m에 이르는 계곡 오른쪽 절벽은 돌병풍을 이어 놓은 듯한 정경을 보여주는데, 암각화가 가장 많이 새겨진 암벽부분은 석양무렵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햇볕이 들지 않는 곳이다. 암각화는 너비 6.5m 높이 3m 가량의 중앙 암면으로서 중심으로 좌우 15∼16m에 걸쳐 새겨져있다. 그러나 그림 위에 다시 그림을 새기는 겹새김, 오랜 세월 동안 비와 바람으로 말미암은 그림의 마멸 등으로 인하여 내용을 알기 어려워진 부분도 많다. 암각화가 새겨진 면은 중앙 암면을 포함하여 모두 9개에 이른다. 그림은 표현대상의 내부를 모두 쪼아낸 면쪼으기에 의한 평면그림과 윤곽만으로 쪼아낸 선 쪼으기에 의한 선 그림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 자수정동굴 나라에 재현한 반구대 암각화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동물상 암각화의 대표이다. 반구대 암각화 중에서 대부분의 동물그림이 모여있는 부분을 주암면이라고 하는데, 주암면의 크기는 세로 3m에 가로 6.5m 쯤 되는데 일일이 쪼아서 형태를 만든 그림들이 밀집되어 있다. 한 암면에 밑에 깔려 있는 걸 제외하고도 2백 2, 3십 종류의 동물들이 있다. 모두 합하면 3백 종류가 꽉 차 있는데 이것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다.
반구대는 어로 수렵의 양면성 때문에 수렵어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이들은 어로나 수렵의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전문집단일 가능성이 크다. 또 배가 신석기 문화 단계에의 뗏목이나 통나무배가 아닌 승선 인원 20여명의 표경선이라는 점과, 포경에 사용된 작살과 작살을 쏘는 노의 그림이 금속문화를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점에서 금속문화 단계에 진입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특이 사항은 면새김에 고래그림이 많이 있는데 돌고래, 향유고래, 솔피, 큰고래, 혹등고래, 흰긴수염고래 등 6종이 있다. 이것은 그 곳이 옛날에 모두 바다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16세기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현재의 태화강 하구에서 10km위쪽에 해당하는 학성 근처까지 미쳤다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도 암각화에서 20km떨어진 울산만에는 고래가 발견되고 있다. 또 하나 그 동안 한반도 정착집단들이 농경과 기마민족의 특성을 지녔다는 설을 부정하듯 배와 고래작살 등의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로기술도 지니고 있었던 점을 보여주고 있다.
* 자수정동굴 나라에 입구에 그려놓은 울주 천진리 암각화
♧ 울주 자수정 동굴 나라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와 언양 석남사 중간쯤에 있는 자수정 동굴은 자수정 광산을 유원지로 개발한 곳으로 총 연장 약 2.5km의 동굴이 2층으로 있고 내부는 약 5,000평 규모이다. 동굴 안의 온도는 사시사철 일정하여 여름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이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자수정 동굴은 경주금령총에서 발굴되어 경주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신라 자수정 목걸이에서 명백히 확인되듯이 보석광산으로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강점기(1910-1945)에는 개발광산은 불법이었으며, 독립 후에는 산주인들이 원시적인 방법으로 수정을 캐었지만 1981년 이곳은 한국을 대표하는 보석광산으로 선정되었다. 이듬해에 제일광산주식회사가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현대적인 채굴에 들어갔다. 자수정 동굴의 수정제품은 국제 인증기관(Gem International Association)으로부터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았다.
* 자수정동굴 나라에 재현한 석굴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보석 연구, 교육기관인 GIA는 이 곳에서 생산된 자수정을 세계최고의 품질로 인정했다. 언양 자수정은 빨간 루비와 파란 사파이어를 오묘히 혼합한 것 같은 그 신비한 자주빛 색채와 흠이 없어 세계 최고의 품질로 공인 받게 된 것이다. 언양에는 현지에서 채석한 자수정을 직접 가공한 보석을 판매하는 한국자수정 산업 관광주식회사 직영 보석상점이 있다.
동굴 안에는 많은 갤러리나 전시장이 있는데 지역 역사와 문화를 집중조명하고 있다. 국립 기기 갤러리, 자수정 전시홀, 이집트 갤러리 등이 교육시설로 활용되고 있으며, 독도 갤러리에는 관광객들을 위하여 독도의 1:46 축소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자수정 동굴에는 신비스러운 자수정이 무더기로 나왔던 당시의 모습을 자연상태로 재현해 놓았다. 이외에도 조각품 전시장과 전통무용 공연장이 있다.
자수정 동굴에는 많은 놀이기구와 수영장이 있으며 보트 탐험 같은 특이한 동굴 관람코스도 있다. 자수정 쪼이는 곳, 고대 인류와 관련한 세계 여러 나라의 유적 모형 특히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각석 그림을 재현해놓고 있어 자세히 살피는데 좋다.
* 자수정동굴 나라에 재현한 고대 에집트관
♧ 울산 학성공원 (울산왜성, 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
① 울산왜성(蔚山倭城) :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왜성. 1997년 10월 30일 울산광역시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시루를 엎은 것 같다고 하여 시루성이라고도 한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쌓은 별성이며, 면적은 59,678㎡이다. 학성공원 안에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왜군은 남해안 곳곳에 왜성이라고 부르는 성곽들을 쌓았는데, 울산왜성도 그 중 하나이다. 왜성은 유사시에 도망갈 수 있도록 강이나 바다 쪽으로 문루를 내고, 본성과 이를 보조하는 성을 쌓은 것이다. 전후 1642년(인조2) 전선창(戰船廠)을 여기에 두는 등 조선 수군도 사용하였다.
1597년 12월 23일부터 다음해 1월 4일까지 조선군과 중국 명군의 총공격을 받아 성 밖에서 싸우던 왜군이 패하여 성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식량이 없어 소변을 마시고 말을 잡아먹으면서 성을 지켰다. 이후 일본에서 원군이 와서 간신히 함락을 면하였다고 한다. 왜군은 성을 삼중으로 벽을 쌓아 수비를 삼엄하게 하였다. 1598년 8월에 다시 조선군 및 명군의 공격을 받아 백여 일을 겨루었다.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은 뒤 철수령에 따라 밤을 타서 성채를 불태우고, 동남쪽 성문 밑 선입지로 후퇴하여 갔다.
* 통도사의 한 부도
② 태화사지(太和寺址) :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황모산(黃茅山)에 있었던 사찰. 울산광역시 태화동의 반탕골 산기슭에 있던 사찰로,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 창건에 얽힌 설화에 따르면, 자장이 중국에 유학하였을 때 태화지(太和池)라는 연못을 지나가다가 한 신인(神人)을 만났는데, 그가 국가를 위해 황룡사(皇龍寺)에 9층탑을 세우고, 경주 남쪽에 절을 지어주면 덕을 갚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자장이 귀국하여 이 절을 세운 뒤, 태화탑을 세우고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 충숙왕(재위 1313∼1339) 때 울주에 살던 정포의 시 <태화루>에 절 이름이 나온다. 그러나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절이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어 고려말에 왜구의 침략에 의해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로 1962년 반탕골에서 발굴된 9세기의 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가 전해지는데, 현재 보물 제4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부도는 우리 나라에서 발굴된 최초의 석종형 부도로, 특히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점이 특이하다.
* 감은사지 삼층석탑
♣ 감은사지(感恩寺址)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용당리(龍堂里)에 있는 신라 때의 감은사 절터.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년(신문왕 2)에 완공하였다. <삼국사기>에 있는 바와 같이, 이 절의 금당(金堂)은 부왕이 죽은 뒤 그 화신인 용이 출입할 수 있도록 신문왕이 건립한 것 같다. 절터는 동해에 이르기 직전의 산기슭에 있는데, 거기에는 큰 3층석탑 2기가 동남으로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을 앞에 두고 서 있다. 금당터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지표(地表)에는 원형 주좌(柱座)가 각출(刻出)된 1개의 초석이 있고, 곳곳에 사각형 초석(楚石)과 대석(臺石)이 있으며, 금당 마루를 이루었던 장대석 등이 있다. 중문터와 회랑터의 남쪽 절반 및 금당터의 대부분이 밭이 되었고, 회랑터 북쪽 절반과 강당터는 민가에 들어가 있다.
* 감은사지 삼층석탑(동탑)
♧ 감은사지 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감은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2기의 화강석제 석탑. 국보 제112호로 2중의 기단에 사각형으로 쌓아올린 3층 석탑으로, 동·서 두 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이다. 2중기단 중의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面石)을 같은 돌로 만들었으며, 모두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졌고, 상층기단은 면석을 12장으로 만들었다. 갑석(甲石)은 하층이 12장, 상층이 8장이며, 탱주(撑柱)는 하층에 3개, 상층에 2개를 세웠다. 탑신은 초층이 우주(隅柱)와 면석을 따로 세웠고, 2층은 각 면을 1장씩, 3층은 전체를 1장의 돌로 앉혔다. 옥개는 옥개석과 받침들이 각각 4개씩이며 받침은 각 층이 5단의 층급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과 3.3m의 철제 찰간(擦竿)이 남아 있다. 많은 석재를 이용한 수법은 백제의 석탑과 같으나, 그것이 목조탑파를 충실히 모방한 것인데 반해 이 석탑의 조형수법은 기하학적으로 계산된 비율에 따른 것이다.
감은사는 682년(신라 신문왕 2)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탑의 건립도 그 무렵으로 추정되어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석탑이다. 1960년에 서쪽 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에 넣어둔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 감은사지 삼층석탑(서탑)
♣ 이견대(利見臺)와 문무왕릉(文武大王陵)
경북 경주시 감포읍(甘浦邑) 대본리(臺本里) 감은사지(感恩寺址) 앞에 있는 신라시대의 유적. 사적 제159호로 지정면적 4,135㎡. 이견대란 <주역(周易)>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千利見大人)'에서 나온 것이다. 신문왕이 감포 앞 바다에 있는 부왕인 문무왕의 해중능묘(海中陵墓)를 망배(望拜)하기 위해 지었다는 곳으로, 1970년 그 건물 터를 발견하여 새로 누각을 짓고 이견대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곳은 <삼국유사>에 신문왕이 죽은 문무왕의 화신(化身)이라는 용을 보았다고 전하는 곳으로,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와도 유관한 유서 깊은 유적이다.
♧ 30대 문무왕릉(文武大王陵)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바다에 있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사적 제 158호이며 대왕암으로도 불리고 있다.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영주이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문무왕이 재위 21년만인 681년에 죽자 유언에 따라 동해구에 장사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창고문 밖의 정원(庫門外庭)에서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에 장사지냈으므로 그 뒤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 신라 문무왕 수중릉
수중릉은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지 크지 않는 자연바위이다. 그 남쪽으로 보다 작은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그 둘레로 썰물일 때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 이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마치 호석처럼 보이고 있다. 대왕암애 올라보면 마치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나오고 들어가는 수로를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동쪽으로 나있는 수로는 파도를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이 외부에 부딪쳐 수로를 따라 들어오고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의 공간에는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내부의 공간은 비교적 넓은 수면이 차지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하고도 큰 돌이 놓여 있는데,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문무왕의 유골을 이 돌 밑에 어떤 장치를 해서 장골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수중 발굴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판석처럼 생긴 돌 밑에는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아울러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더구나 바위의 안쪽에 마련된 공간에 사방으로 수로를 마련하고 있는 것은 부처의 사리를 보관한 탑의 형식에 비유되고 있다. 즉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의 산치탑의 경우나 백제 무왕 때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익산 미륵사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문무왕의 능은 전대의 왕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예이다.(완)
* 1박하고 나서 들른 영취산 통도사
♬ 최무룡 / 외나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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