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단장한 궁전으로 가는 길
잔인한 달 4월은 별다른 생채기를 남기지 않고서 그렇게 가고 있었다. 밝은 햇빛이 내 비치는 4월의 마지막 주말. TV에서 한 자폐아와 그 엄마가 겪는 고통을 본 후로,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오름에 오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어느 회원이 얘기가 아니라도 기분 좋고 축복 받은 전형적인 봄 날씨였다. 한밝 저수지를 지나 들어선 산록도로 주변은 고사리 꺾으러 나온 사람들로 수놓아지고, 시제(時祭)를 올리고 있는 곳도 보인다.
소길 공동목장 좁은 문을 통과하고 높은 언덕에 올랐을 때 눈앞에 우뚝 선 노꼬메큰오름. 언제 저렇게 초록빛으로 변해버렸는지 매끈한 살결이 요염하게 웅크린 나부(裸婦)같다. 지대가 높은 곳이어서 그런지 아직도 제비꽃이 길섶을 장식하고 가끔씩 하얀 꽃송이를 수줍게 내민 남산제비도 보인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가는 길 주변을 살펴 고사리를 꺾으며 숲 속 새로 단장한 궁전으로 들어간다.
▲ 저마다 새로 잎을 피워 올린 나무들
멍석딸기꽃에다 눈길을 주다가 주변을 살피니, 소나무를 제외한 잡목이 전부 베어져 있다. 숲을 가꾼다고 소나무보다 더 소중한 자연림을 베어버리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정말 관에서 하는 일들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때문에 두릅나무 군락인 이곳을 잔뜩 기대했던 일행들은 너무 어이없을 수밖에. 다행히도 오름 능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에서부터는 잡목림이다.
고로쇠나무와 단풍나무 잎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펴고 우리들을 맞는다. 언제 가느다란 나뭇가지 속에 저렇게 연한 초록빛을 저장해 두었다가 일시에 저렇게 내놓는지, 나뭇잎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꽃이라 표현해야 할만큼 예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산딸나무, 때죽나무, 분단나무, 다래나무, 꾸지뽕나무, 쥐똥나무, 산뽕나무, 서어나무, 가막살나무, 나도밤나무, 엄나무, 산벚나무, 졸참나무 등도 저 나름대로의 잎사귀 모양을 갖추었다.
▲ 나무 그늘에 다투어 핀 들꽃들의 향연
개족두리풀 꽃이 피었다고 사진을 찍으며 몰려 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꽃의 색깔인지 영 눈에 띄질 않는다. 잎사귀는 심장(heart) 모양의 얼룩무늬인데 짙은 자줏빛 꽃 한 송이 달려있는 것이 흙에 묻혀버려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쉽게 구분이 되질 않는다. 저렇게 되면 벌 나비가 어떻게 찾아올지 의심이 간다. 저마다 현란한 색으로 위장하여 온갖 유혹을 보내는 다른 꽃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향기가 진한가?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반면 그 주위에 피어 있는 현호색(玄胡索)은 그런 대로 현란해 보인다. 어떻게 저런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지만 '호색(胡索)'의 음이 동음이의어 '호색(好色)'을 생각하게 하는 신비에 가까운 색이다. 색이 다양한 점도 있지만 갓 피어날 때부터 빛이 바래기 시작하여 여러 가지 색으로 변한다. 족두리풀꽃과 비교하여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다. 그것도 사람에 견주면서….
▲ 제주 오름에 나타나는 철쭉꽃
봄이 되면 한반도의 산과 들에는 진달래가 피어난다. 곳에 따라서는 지천으로 피어 귀찮을 만큼 흔한 꽃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진달래를 찾기가 힘들다. 어렸을 때 냇가 바위 사이에서 피었던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이리저리 뽑아가 버려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한라산이나 높은 오름의 것은 털진달래이고, 곳곳에서 피어나는 것은 산철쭉이다.
요즘 제주도의 해발 500m 이상 되는 오름 정상부에서 털진달래나 산철쭉이 몇 무더기 발견될 뿐이다. 그리고 높은 지대의 오름 숲에 가보면 연산홍이나 참꽃나무가 드물게 발견된다. 그리고 길가에나 화단에 심어놓은 것들은 산철쭉이 아니면 개량철쭉들이다. 이곳 탁 트인 산등성이에도 어김없이 산철쭉이 피어 우리를 맞는다.
▲ 정상에서 보는 주변 경치
산등성이에 각시붓꽃이 수줍게 피어 있다. 비록 풀 속에 숨어 피지만 꽃의 색이라든가 무늬가 개성이 있다. 오늘은 황사가 좀 옅어서 한라산이 가까이 다가앉은 느낌이다. 노로오름에서부터 밋밋하게 펼쳐진 숲과 벌판은 노루의 집단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이 넓은 숲 속에 노루가 숨으면 좀처럼 찾을 수 없을뿐더러 큰 오름과 작은 오름 남쪽에 펼쳐진 풀밭은 이른봄에 노루들이 햇볕을 즐기며 오금을 펴는 곳이다.
멀리 어승생악으로부터 천아오름, 산세미오름으로 이어지는 곡선이 그윽하고, 바로 옆구리에 붙어선 족은노꼬메와 아래로 궷물오름, 서쪽으로 바리메와 족은바리메, 그 너머 괴오름과 북돌아진오름, 남쪽으로 치우쳐 폭낭오름, 빈네오름, 다래오름, 검은들먹과 안천이오름 등 멀리서 가까이서 다정한 모습이다. 정상에서 분화구 쪽으로 내려간 곳 절벽 위에 위태하게 걸려 있는 무덤은 벌초를 하지 않은 채로 있다.
▲ 숲 속의 여왕 백작약
사실 이 오름 이름의 한자 표기는 녹고악(鹿古岳, 鹿高岳)인데 '사슴 록(鹿)'자에 비중을 두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견강부회적 해석이고, 그보다 더 전의 표기인 고산(高山)으로 미루어 '높다'의 '높'의 음차(音借) 표기로 본다. 사실 이곳 녹고메큰오름의 표고는 833.8m이며 실제 높이인 비고는 234m, 족은오름은 표고 774.4m에 비고 124m로 주위의 어느 오름들보다도 우뚝하다.
정상에 앉아 북쪽 벌판에 자리잡은 경마장을 보면서 모두들 한 마디씩 하고는 동쪽 가파른 사면으로 내려가 들판에서 고사리를 좀 꺾고 남쪽 사면을 통해 족은오름에 오르기로 했다. 열심히 내려가는데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 있다. 백작약 꽃이 피어 사방을 환히 비치고 있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이게 얼마만인가? 아직도 사람의 눈을 용케 피해 살아남았다가 아름다운 자태로 피어 있는 작약을 대하니 감개무량하다.
▲ 사라져가는 특산 식물들
사실 한라산은 식물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남쪽에 위치하고 고도가 높은 점 외에도 해양성 기후라든가 섬이라든가 하는 위치적 특성 때문에 수많은 식물이 자라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한라산은 몸살을 앓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발길과 무자비한 채취,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번지고 있는 제주조릿대와 개체수가 늘어나는 노루가족들 때문에 희귀종들이 점차로 사라져 간다.
이 백작약은 꽃이 고울 뿐만 아니라 한약재로 여러 곳에 쓰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게 되는 것이다. 백작약(白芍藥)은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인데 붉은 색의 산작약과도 구별이 되며, 재배하는 붉은 빛을 띤 작약과는 모양이 전혀 다르다.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다음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결국 이 백작약을 찍느라 두 사진작가가 남았고, 우리는 다시 간 족은오름에서도 커다란 꽃을 피운 백작약을 또 만날 수 있었다. [2004. 4. 25.]
♬ 정태춘 '들 가운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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