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엉또폭포와 고근산, 그리고 광이오름

김창집 2001. 8. 14. 23:40

□ 2001년 8월 12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흐렸다 맑기도 함


△ 엉또폭포, 그 규정(規定)할 수 없는 아름다움

 아침까지 이어진 비 날씨. 어제 낮부터 내린 비의 양(量)이 오늘은 분명히 엉또폭포가 터졌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래 무조건 엉또폭포 보고 나서, 날씨를 보며 다음에 오를 오름을 결정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좁은 섬이지만 제주도의 날씨라는 게 변화무쌍해서 늘 우리를 긴장시키기도 하고 기대를 갖게 한다.

 

 제1횡단도로로 접어들어 오라골프장 입구에 이르렀을 때, 안개가 10m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어진다. 이건 아예 안개 터널이다. 모처럼 안개를 만난 나무와 풀들이 풍성한 자연의 혜택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모든 차들이 비상등을 깜박이며 거북의 걸음을 하고 있다. 멀리 사라오름에서 발원한 내[川]들이 수량은 많지 않으나 성판교, 논고교, 수악교 밑을 모두 흘러 지나가고 있다. 저 정도면 엉또폭포가 제법 멋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런데, 신례리 왕벚나무 자생지 옆을 지나면서 물오름[水岳]이 바라다 보이는 것이 안개가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차창 너머로 후끈한 열기가 끼치면서 서귀포 특유의 후텁지근한 날씨에서 불길한 징조를 발견한다. 아닌 게 아니라 상효교를 지나면서 한라산 정상에서 발원하는 돈네가 바짝 말라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리 기대되는 물 없는 폭포에 대한 실망을 완화시켜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비록 오늘 폭포를 못 보게 되더라도 기암절벽과 주변 경관을 보고, 장소를 알았으니까 앞으로 이곳을 지날 때 내가 터져 있으면 그때를 기약하라는 말을 듣고는 저윽이 실망하는 눈치--.

 

 16번도로인 중산간도로를 따라가다가 고근산을 지나고 신시가지 월드컵 보조 경기장 앞 산림조합 임산물직매장을 넘어서서 오른쪽을 살피니, 엉또폭포가 1km 안에 있다는 세로 간판이 서있다. 양쪽이 밀감 과수원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길을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진 높은 기암을 발견하게 된다. 가운데 불상과 양쪽에 석등이 세워져 있는 과수원 정문으로부터 나무가 없는 길로 들어가니, 드디어 물소리가 들리는 냇가 숲에 이르게 된다.

 

 절벽 위에는 구실잣밤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그 아래로 천선과나무에 열매가 수북하게 달려 무르익었다. 비가 온 뒤라 미끄러지며 들어갔다. 덜 알려진 탓으로 아직 도로가 제대로 개설되지 않아 이끼를 머금은 바위가 무척 미끄럽다. 높이가 약 40m에 달하는 기암절벽과 곳곳에 우거진 천연의 난대림은 비록 폭포수가 쏟아지지 않아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중국 칭다오[靑島]에 갔을 때 이름 난 노산의 용담폭포도 비가 안 와 물 한 줄기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더니, 이곳에는 수면 2m 정도를 남기고 바위 속에서 하얀 물줄기가 힘차게 솟아나 미니 폭포를 이루고 제법 큰 물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정신이 없었다. 천둥보다도 더 큰 물소리를 들으며 폭포와 마주했을 때, 완전히 압도당해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절벽이 너무 높았고 물줄기가 크고 힘차 바싹 다가서게 되어 있는 위치 때문에 바로 삼켜버릴 듯한 위세였다. 가속도가 붙어 곤두박질쳐진 물에서 튀어오르는 물과 내리 쏟는 물이 서로 부딪쳐 물보라를 이루며 오른쪽으로 흘러 올라가 나무 위로 사라지는 모습은 신비하기까지 했고, 마침 오후라 내비치는 햇살에 쌍무지개가 걸려 환상적인 분위기가 되어갔다.

 

 그때는 정말 제주도를 다 안다고 나름대로 자부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비가 많이 와 냇물이 크게 불어야 형성되는 장관이지만 그 흔하지 않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축복 받은 사람이다. '엉또'라는 말은 '엉('절벽' 또는 '언덕'의 뜻)'과 '도(입구)'의 합성어이다. 이 후 도합 세 번 이 폭포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김수영의 '폭포'라는 시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 김수영의 '폭포' 전문

△고근산(孤根山), 서귀포를 지키는 전망대

 폭포도 제대로 못 보고 맛만 보고 나왔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고근산 옆에 왔으니 어떻든 올라가 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입구에 차를 세운다. 서귀포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아담하게 공원으로 조성된 고근산은 주위에 비견할만한 오름이 없이 홀로 우뚝한 산이다. 진입로에 보안등까지 설치돼 있는 것이 야간에도 쉽게 오를 수 있겠다. 마침 소나기가 뿌려 파카를 둘러썼더니 땀이 솟기 시작한다. 차라리 젖는 것이 낫겠다고 벗어버리는 회원도 있다.

 

 산책길로 접어드는데 나무판에 이곳 출신 한기팔 시인의 '고근산'이란 시가 뒤편의 김소월의 '산유화'와 짝을 이뤄 들꽃을 노래하고 있었다. 두 갈래 산책길은 철도 받침목을 들여다 계단을 만들어 놓아 시멘트나 폐타이어를 이용한 것보다는 단정해 보인다. 산방산과 비슷한 높이인 해발 396m의 오름을 공원화 해놓아 이 지역 주민들이 아침 저녁 운동 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곳곳에 매달아 놓은 커다란 새집이 개발의 상징처럼 덩그마니 달려 있다. 저 새집 속에 들어가서 살 새가 어디 있을까? 어디 높은 나무에 작고 단단하게 달아주면 몰라도…. 어설피 오름을 개발하는 것이 바로 그런 우(愚)를 범하고 있지나 않은지.

 

 곳곳에 운동 기구를 어설프게 박아 놓았다. 정상에 둘레가 560m나 되는 분화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놓았다. 북쪽으로 돌아가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서니 눈앞에 바로 지난 주 갔다온 각시바위가 보인다. 그곳에서 보았을 때는 사방에서 가장 높고 멋있게 생각되었는데, 여기서 보니 그곳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우리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있지나 않는지? 자기 위주로 보면 자신이 모든 일에 당당한데 다른 사람들은 별 볼일 없이 여기는…. 따라서, 우리는 늘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일 때 상대는 나의 높이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건 아닌지.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앉아 서귀포 시내를 굽어보며 참외와 오이를 깎아 먹는다. 바람은 서귀포 시내를 거쳐 이곳으로 불어온다. 요즘 밀감이 제값을 못 받는 바람에 점심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그 흔한 삼겹살도 안 구워 먹는지 온통 풀 냄새뿐이라고 우스개를 했더니,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여기서는 서귀포 시가지가 다 내다뵈는 전망대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다. 서남쪽으로는 최남단 마라도와 가파도, 송악산 등까지 환히 드러난다.

 

 오늘은 산책 코스를 따라 올랐지만 처음 올 때는 북쪽 능선으로 올랐다. 억새가 피어 한껏 나부끼는 어느 가을 오후였는데, 다가서 보니까 마침 오후의 태양과 오르는 방향이 일직선으로 되어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물고기의 비늘처럼 파닥거리는 억새를 보면서 오를 수 있었다. 그 날 이후 숱하게 오름을 다니면서도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억새를 만나본 적이 없다. 또 한번은 늦가을에 왔는데, 그 때는 시기적으로 좀 늦어 그런 감동은 느끼지 못하고 대신 머루와 보리수나무 열매를 많이 따먹은 기억이 새롭다.

 

 이곳 고근산 봉우리 바로 밑에는 커다란 구멍이 수직으로 뚫려 있어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하루는 문질이라는 사람이 물건을 잃어버려 이웃의 한 사람을 의심하게 되었는데, 결국 그 사람이 이 굴속에 숨겨두었다고 고백해 문질과 그 사람이 그 굴을 찾았다. 둘은 함께 굴속으로 백 여장이 넘는 줄을 던져 내려가다 떨어졌으나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스스로 올라올 수가 없어 사람들을 부르니 문질의 아들이 줄을 늘어뜨려 그 줄을 잡고 올라왔는데 굴 밑에 낙엽이 많이 쌓여 있어서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을 '강생이궤', '강생이굴'이라 부르며, 이곳에 돌을 던지면 범섬에 있는 '조근똥구냥'으로 돌이 나온다는 재미있는 전설도 전한다. 남동사면 중턱 '머흔저리'라는 곳에는 숲 속에 너럭바위가 있는데 곡배단(哭拜壇)이라 한다. 예전 국상(國喪)을 만났을 때 북쪽에 있는 임금을 향하여 절하던 곳이다. 오름 중턱에는 소나무를 중심으로 삼나무, 편백나무, 상수리나무, 밤나무 등을 심어져 있다.

 

 북쪽 사면 억새 밭에는 얼마 전에 비자나무를 심었으나 잘 자라지 않았으며, 정상 서귀포 쪽으로는 사스레피나무, 예덕나무, 산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예전에는 드문드문 소나무만 자라는 풀밭 오름이었다. 내려오면서 보니까 벚나무도 심었고, 올해 했는지 감나무를 규칙적으로 심어 놓았다. 설문대 할망이 심심할 때면 한라산 정상부를 베개 삼고, 이곳 고근산 굼부리에 궁둥이를 얹어 앞 바다 범섬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서 물장구를 쳤다는 낭만적인 전설을 생각하며 내려왔다.

△ 돌꽃 탁본과 법화사지 연꽃을 보고 광이오름으로

 서귀포 시가지에서 점심을 끝낸 일행은 금강 스님의 꽃 문양 탁본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갤러리 다비치·리를 찾았다. 그곳 조그만 전시관에서는 '돌꽃이 피는 자리'란 주제로 9월 10일까지 탁본전을 열고 있었다. 이 작품전을 연 금강 스님은 현재 땅끝마을 미황사에서 수행하고 계신데, 합천 해인사로 출가하여 장경각에서 팔만대장경과 만나 탁본을 시작하여, 1996년 서울과 대구·광주에서 '미황사와 구산선문 탁본전'을 열었고, 1997년에는 백양사에서 고불미술관 개관 기념으로 '천년의 미소'라는 탁본전을 열었다 한다.

 

 서귀포시 토평동 깊숙한 곳 '청재설헌'이란 방갈로 비슷한 곳에는 여기저기서 수집한 토종 풀꽃과 나무들을 모아 한창 조경이 진행 중에 있었다. 제법 신경을 써서 이루어놓은 화단에는 여러 가지 꽃이 피어 있었다. 네모진 조그만 연못에는 수련이 몇 송이 피어 있었는데, 그 중 다 피어 벙그는 흰 수련꽃을 쭈그려 앉아 보고 있다가 제주일보의 김오순 기자를 만났다. 같이 들여다보던 김 기자는 법화사지 구품연지에 연(蓮)을 심던 기억을 떠올렸다며 연꽃을 보러 가자고 한다.

 

 서귀포시 하원동 중산간에 위치한 법화사지(法華寺址)는 제주시 외도동의 수정사지(水精寺址)와 더불어 고려 후기 제주 지방의 대표적 사찰 터이다. 법화사는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완도 청해진(靑海鎭)의 법화사와 더불어 창건 연대가 통일신라시대라는 주장이 없지 않으나, 대사찰로서의 확실한 증거는 1992년 법화사지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명문 기와편을 통해 고려 충렬왕(忠烈王) 5년, 중국 원나라 연호 지원(至元) 16년으로서 서기1297년에 해당되는 시기에 중창되었음이 밝혀졌다.

 

 그 후 태종 6년(1406년)에 법화사에 안치되었던 아미타삼존불상을 명에게 넘겨준 후 계속된 억불책에 의하여 교세가 약화되어 갔다. 이와 관련한 기록을 살펴보면 명의 사절이 조선에 와서 이르기를 '제주 법화사에 있는 아미타삼존은 원나라 양공(良工)이 만든 것입니다. 저희들이 곧바로 가서 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하여 아미타삼존불의 인도를 요구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나주로 옮겨 명의 사절에게 인도하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법화사는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사찰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태종실록' 8년 2월 정미조에 의하면, '법화사는 대정현 하원에 있었던 절로 당시 비보사찰로 노비만도 280인이나 있는데, 1408(태종 8년)에 의정부에 아뢰어 제주목 수정사 노비 130인과 함께 각각 노비 30인만 주고 나머지는 모두 전농사에 귀속시켰다'고 되어 있다. 그 이후로도 법화사는 가장 큰 비보사찰로 유지되어 오다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이원진이 '탐라지'를 기록할 즈음(1653년)에 폐사되었다. 대웅전이 복원된 앞 마당은 잔디밭이 곱게 조성되어 있고, 가운데를 살린 둥그런 연못에는 심은 지 얼마 안되어서 그런지 몇 송이 연꽃만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돌아오다 아무래도 아쉬워 들른 신제주의 광이오름은 한라수목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남짓은오름의 일부분과 한라수목원을 연결하는 시민공원으로 조성되어 오름이라는 느낌이 약하다. 괭이오름이라고도 하며 옛지도에는 간열악(肝列岳)으로 나와 있는데, 등성마루가 평평하고 남동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화구를 이루고 있다. 오름의 형태가 간(肝)의 모양으로 생겨 간열악이라고 하며, 그 때문에 서쪽으로 이어진 낮은 상여오름은 염통과 같이 생겼다고 염통악이라고도 한다.

 

 표고 266.8m, 면적 236,701㎡로 오름 남서쪽 기슭에 '거슨샘이'라는 샘이 있고, 오름 기슭자락은 한라수목원이 제주도 자생식물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거슨샘이의 의미는 샘솟아 흐르는 방향이 저지대인 북쪽이 아니고, 한라산 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온통 해송으로 뒤덮여 잡목과 함께 혼재림을 이루고 있는데, 한라수목원을 조성하면서 149,782㎡의 면적에 872종(목본 470종, 초본 402종) 5만 본을 심어 자연학습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라수목원은 교목원, 관목원, 약ㆍ용원 ,희귀특산수종원, 만목원, 화목원, 도외 수종원,죽림원, 초본원, 수생식물원 등 10개원과 온실, 양묘 전시포, 삼림욕장, 시청각실 및 휴게실, 체력 단련 시설, 편익시설, 주차장 등을 갖추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한 그루만 발견된 초령목과 만년콩 등 희귀식물과 천지연에 만 있는 멸종 위기에 놓인 죽절초를 복원하는 등 온실시설은 멸종 위기의 식물을 살려내는 새 생명의 현장이기고 하다. 일요일을 맞아 가족끼리 어울려 이곳을 거니는 꼬마들이 노트에 하나하나 찾아 명패를 보면서 나무 이름을 적는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다.

▲ 사진 위는 요즘 한창 피어나고 있는 술패랭이꽃이고, 아래 것은 지기 시작한 '계요등'이다. 술패랭이꽃은 풀밭에 섞여 피는데, 이 꽃에서 카네이션을 개발했다는 얘기가 있다. 계요등은 덩굴식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