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비와 안개와 바람 사이

김창집 2001. 10. 3. 12:28
△▲ 빗속의 높은오름과 바람 속의 정물오름

△ 빗속으로 떠나는 여행

새벽부터 시작된 비가 심상치 않다. 가을비치고는 제법 끈기 있고 야무지다. 태풍 '레기마'의 영향이라는데, 이러다 이번 추석도 달구경할 수 없게 만드는 건 아닐까? 비가 오고 명절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6명이 모였다. 그래도 이 분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라는 슬로건을 따라서, 다음 주에 있을 오름오름 축제도 걱정하며 비를 뚫고 와 준 것이다.

비 때문에 늘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계단에 앉아 있지 못하고, 그곳에 면한 다세대 주택 현관에 서서 일정을 의논했다. 우선은 오름 진입로 어디까지 대형 버스 3대가 들어 갈 수 있는가를 확인할 것, 동거미오름과 연계할 오름을 확정한 뒤 일행이 움직이는 동선(動線)을 살펴보고 철조망 등 장애물의 확인, 점심 식사와 행사 장소 물색, 그리고 하산할 때 이동로와 차 댈 곳을 보고 돌아오면 오늘의 임무는 완수될 것이다.

승용차 2대에 나눠 타고 동부산업도로를 달린다. 비는 갤 줄 모르고 안개까지 자욱하다. 길 양쪽에는 억새들이 비를 맞고 후줄근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비 안 올 때 같으면 날씬한 몸짓으로 날아갈 듯 하늘거릴 것을. 하긴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무리 우아하고 기품 있는 사람도 역경에 처해 있을 때면 너무 초라하게 보이는….

대천동 4거리를 지나 송당에 이르러서도 비는 그칠 생각을 않고, 안개도 여전하다. 아무래도 이 동쪽은 여름철에 서쪽보다 비가 많다. 한라산의 영향이다. 갑자기 차창 밖으로 물이 솟아오르며 차가 기우뚱한다. 물 고인 줄도 모르고 상습 침수 구역을 달린 것이다. 배수구를 조절해야지, 눈이 쌓일 때도 위험한 곳이다. 눈을 들어 옆 밭을 보니, 콩을 심었는데 색깔이 많이 누래졌다. 그래, 계절은 속일 수 없나보다.


▲ 빗속의 높은오름과 동거미오름

'구좌읍 공동묘지'라는 표석(標石)을 바라보며 진입로로 들어섰다.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으나 아무래도 대형 버스가 들어오기에는 무리다. 길이 좁은 곳이 많고 급커브가 몇 군데 있어 지난 번 답사 때도 애를 먹었다. 이왕지사 오름 축제인데 오름 입구까지 한 500m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안전하게 큰길에 차를 세우고 걸어 들어오는 걸로 정했다. 양쪽에 후줄근하게 젖어 기가 죽은 채 서 있는 억새들도 이 날이면 바로 서서 즐거움을 줄 것이다.

공동묘지 취사시설이 있는 하산 코스에 다가가서 동거미오름을 바라보았으나 500m 정도 떨어진 오름은 그 뿌리만 겨우 확인할 정도로 안개 속에 깊숙이 가려져 있다. 오름은 이번 비로 물기를 함빡 머금고 마지막 가을꽃을 피워댈 것이다. 그 진통으로 모태가 되는 오름이 저렇게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비가 그치면 물매화도 마지막 봉오리까지 활짝 피어 그 하얀 꽃잎을 해맑게 씻고 우리를 맞으리라.

돌아오다가 높은오름 진입로를 확인했다. 철조망 문을 풀고 젖은 풀숲을 헤치며 들어간다. 벌써부터 피기 시작했던 쑥부쟁이가 맑게 씻은 얼굴로 인사를 하고, 섬잔대도 모두 피어 긴 장대에 종을 주르르 매단 채 한없이 몸을 흔들어댄다. 소가 지나다니며 만들어 놓은 길이 어지러이 나 있어 혼란을 주기는 하였으나, 어느 길도 결국 정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그렇게 헤매지는 않았다.

가을비는 봄비나 여름비와는 달라 그 추기 때문에 쉽게 비옷을 파고든다. 벌써 신발 속이 젖어 칙칙하다. 시계(視界)가 10여m밖에 안되어 갑갑하지만 진입로는 확인이 되었기 때문에 내려가기로 하고 젖은 풀을 헤치며 내려온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원하지 않은 길을 가기도 하고, 마음먹은 길도 주위 여건 때문에 포기하기를 반복하듯이, 오늘 이 오름 역시 길을 열어주지 않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기에, 이제 날이 개이면 언제 그랬냐 싶게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리라 믿는다.

가던 길을 되돌아 나와 동거미오름에서 걸어 나올 길을 확인하러 갔다. 왼쪽에 나지막한 손지오름까지도 안개에 싸여 있다. 양쪽에 억새가 피어 우리를 맞는다. 이 억새들은 오름오름 축제에 참가한 손님들을 마지막으로 배웅하면서 시골 할머니처럼 손을 흔들어 보낼 것이다. 300m 지점쯤 설치해 놓은 철문에 다다랐다. 이곳은 원래 구좌읍 하도리 공동목장이었는데, 이젠 집집마다 소를 치지 않기 때문에 목장을 하는 분께 임대해준 모양이다. 큰문은 자물통으로 굳게 잠겨 있고 옆에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문만 여닫을 수 있도록 묶어 놓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더 이상 차가 갈 수 없어 할 수 없이 차를 돌려 빠져 나왔다.

△ 비와 안개가 없는 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며

흡족하지는 않지만 빗속에서도 오늘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비가 아니라면 겸사겸사 이곳 오름의 향기를 즐겼을 것인데, 할 수 없이 물러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왕 나왔으니 오름을 하나 올라야 하지 않으냐는 생각에 서로의 얼굴들만 쳐다본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생각이 미쳐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섬 서쪽에 사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곳은 이른 아침에 비가 내렸으나 지금은 바람이 불고 빗방울만 오락가락한다는 전언이다.

일단 서쪽으로 가서 거기도 비가 내리고 있으면 정상에 정자가 있는 수월봉에 가서 앉았다 오자는 데까지 의견이 접근되자 가만히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안개와 비를 뚫고 교래리 쪽으로 차를 몰았다. 산굼부리도 보이지 않고 입구에 쌓아놓은 돌무더기만 안개 속에서 이국의 정취를 자아낸다. 생각해 보니 지난 5월에도 이 절차를 밟아 서쪽으로 가서 오름에 오른 기억이 있다. 그 날은 구드리오름에 가서 새우란을 보자고 가다가 비가 너무 오고 안개가 껴서 도저히 갈 형편이 못 되어 정석공항 입구에서 차머리를 돌렸었다.

그러나 오늘은 갈수록 안개가 심하고 비는 좀 가늘어졌지만 갤 기미가 안 보인다. 제1횡단도로인 5·16도로에 들어서서 견월악 송신소를 지나고 보니, 오라골프장 안에 차가 보인다. 모처럼 어렵사리 부팅해 놓은 걸 어쩌지 못해서 차안에서 조금 비가 가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산천단에서 산록도로로 접어들었다. 평소에는 제법 북적거리는 도깨비도로에 지금 시간에는 아무도 없다. 지난여름 흥청거렸던 섬문화축제장 입구에도 조형 상징물만 외로이 서 있다.

제2횡단도로로 빠져 한밝저수지를 지나 산록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바람이 불고 약간 밝아지기 시작한다. 지난 5월에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 완전히 맑았었다. 산록도로를 다 빠져 나와 서부산업도로에 진입해보니, 눈앞에 펼쳐지는 들판…. 갈수록 앞이 트이고 길옆에 돌이 젖지 않은 부분도 있다. 정월 대보름날에 들불축제를 했던 새별오름도 완연히 그 모습을 드러내 가뭄 탓인지 누런빛이 도드라졌다. 앞차에 전화를 걸어 이 중에 어느 오름을 오르자는 제의에 선뜻 정물오름을 얘기한다. 5월에도 결국 정물오름에 올랐지만.


▲ 가뭄이 왜 생기는지 가르쳐 준 정물오름

올해는 정물오름과 인연이 너무 깊다. 지난겨울부터 시작해서 예닐곱 차례는 오른 것 같다. 비는 오지 않고 바람이 거세 오히려 춥구나. 원래 이 오름은 완만한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오르는 것이 정상인데, 일행 중에 오늘은 거꾸로 오르자는 제의가 있어 그러기로 결정하고 샘을 지나 오른쪽으로 급한 능선을 오른다. 거센 바람에 억새가 심하게 눕는다. 참취가 많은 곳인데 꽃이 다 지다 끝자락에만 희뜩희뜩 꽃잎이 몇 개 붙어 있다.

수크렁 이삭이 시커멓게 피어올라 가을이 제법 깊어졌음을 알린다. 그 사이로 해맑은 모습의 쑥부쟁이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 꽃을 드려다 보고 있으면 젊은 시절 막연히 그려보던 소녀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아 가슴이 뜨끔해진다. 그 모습이 첫 휴가 때 고향 바닷가 해수욕장에서 만났던 소녀의 얼굴을 꽤 닮았다. 조개껍질을 가만히 귀에 대고 바다소리를 듣던 이름 모르는 소녀. 나는 고운 조개껍질을 한 움큼 주워, 작고 귀여운 그 손에 쥐어주고 소녀 곁을 떠났다. 마치 꿈에서 깨지 않으려는 듯이….

중턱 이후부터 섬잔대의 종소리가 더욱 요란해진다. 정상에 이르러 보니, 바람이 더욱 세차져 도무지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억새와 띠가 바람을 막아주는 서쪽 경사면으로 내려서서 쉴 곳을 찾았다. 자리를 잡고 사방을 살핀다. 한라산 윗세오름 위 서북벽을 기점으로 서북쪽으로 좁은 부채꼴 형태로만 구름이 사라지고 나머지는 전부 안개와 비구름에 싸여 있다. 아! 그제야 깨닫는다. 왜 성산, 표선, 남원에 비가 많이 내리고, 이곳이 한발(旱魃) 지역이 되는가를….

비가 많은 5월서부터 태풍이 끝나는 10월까지 대부분의 비를 몰아오는 구름은 남동풍에 실려 오게 마련이다. 이에 따라 바람이 먼저 닿는 남동쪽은 비가 많고 한라산에 걸려 더 진행을 못하는 서북쪽편 안덕, 대정, 한경에는 비가 적은 것이다. 바라보니 방금까지도 맑았던 새별오름과 이달봉이 구름에 잠기고 북쪽에 있는 금오름도 거의 가렸다. 다만 바로 눈앞에 있는 도너리오름만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1000년 전에 터진 것으로 추측되는 동쪽 분화구가 깔때기처럼 환하다.

그 위로 산방산이 뚜렷하고 사이로 송악산과 멀리 마라도까지,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고 선명한 물빛을 배경으로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다. 오늘 오름 행을 포기해 집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지 않고, 돌고돌아 이곳에 왔기에 저처럼 자연이 연출하는 감동 어린 장면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종종 겪는 일이지만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지레 짐작하고 포기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이곳에 온 여섯 사람만큼은 그런 타성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내려오는 길에는 오이풀이 유난히 많았다. 신비스럽게도 오이 냄새가 솔솔 풍기는 오이풀을 난 처음엔 박과에 속하는 식물인 줄 알았다. 하긴 박과 식물과는 확연히 다른 생김새이기 때문에 반신반의는 하였지만. 알고 본즉 오이풀은 의외로 장미과의 다년초였다. 그리고, 한방에서는 뿌리를 지유(地楡)라고 하여 수렴·해열·설사·이질·지혈·월경과다·객혈·피부병·상처 및 화상과 열상 등에 사용하는데, 17%의 타닌과 사포닌이 함유되어 있다 한다.

존경과 변화, 연모를 꽃말로 가진 오이풀은 꽃꽂이 소재로 많이 쓴다. 그냥 꺾어다 병에 꽂아 놓으면 마르면서 1년 정도 간다. 거기에 계절에 따라 필요한 꽃을 곁들이면 좋다고 한다. 너무 많아서일까. 난 오늘 오름에 오르면서 절대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금기를 깨고 말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후회하고 있지만, 이렇게 많은데 조금 뜯어도 괜찮겠지 싶은 마음에 그만 한 줌 뜯어다 꽃병에 꽂은 것이다. 양심이 가책이 되어 이렇게 털어놓는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만이라도 용서를 구하고 싶다.

. ---- 2001. 9. 30. 일요일. 추석 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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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는 오이풀이고, 아래는 정물오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