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과오름, 그 영원한 어머님의 품

김창집 2001. 9. 25. 20:46

△ 제주의 벌초(伐草) 풍습

제주도에서는 음력 8월 초하루가 되면 너나 없이 모두 모여
조상 무덤에 벌초하는 풍습(風習)이 면면이 이어져왔다.
차가 없어 걸어다니던 시절에는 대부분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지만
자동차로 1시간이면 섬 어디든 가는 요즘에는
일터를 중심으로 흩어져 살다가
1년에 한 번 모두 한 곳에 모여 핏줄을 확인하고
벌초를 하며 안부를 묻는 아름다운 전통.
이 날은 초·중·고 학생들도 모두 방학을 하여
숭조(崇祖) 정신을 배운다.

고(高)·양(梁)·부(夫) 3성을 제외하면 모두가 본토에서
새 삶을 찾아 물을 건너 왔던가,
아니면 귀양살이라도 왔다가 눌러 앉았던가,
그도 저도 아니면 간혹 벼슬살이 왔다가 섬이 좋아 눌러앉은 경우도 있을 터.
환난(患難)이 많았던 고려 시절,
그리고 당파 싸움으로 날을 지새던 조선시대에 대거 건너와
입도(入道) 10세에서 20세까지가 주종을 이룬다.

하기에 고작 20촌(寸) 미만의 피붙이들은
촌수를 쉽게 엮을 수 있어
정말 손을 잡으면 피가 통하는 느낌이 들고
오랜만에 참가한 젊은 종친(宗親)들도
개인주의를 훨훨 떨쳐 버리고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장소.

이 날은 섬 안의 산이면 산, 들이면 들, 흩어진 묘(墓) 자리 찾아
풀 깎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로 온 섬이 들썩들썩 웅성웅성
진풍경을 연출하는 그야말로 조상을 섬기는 날.
하기에 추석날은 성묘는 하지 않고
가까운 친척집을 돌아다니며 차례 지내며 논다.

▲ 선사시대 유적 1번지, 내 고향 곽지리(郭支里)

제주섬 북쪽 바닷가에 자리한 북제주군 애월읍 곽지리
남쪽으로 한라산이 의젓이 앉아 큰 바위 얼굴처럼 지켜보고
북쪽 해변으로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모래 고운 해수욕장을 이루는
거기다 동남쪽에 알맞게 솟아오른 과오름 삼형제
큰오름 셋오름 말젯오름 삼태봉이 마을을 굽어 살펴
성을 쌓아 북풍과 모래를 막고 살았대서 곽지리(郭支里).

고려 때 기생화산이 폭발하면서 해일(海溢)이 일어나
모래를 온통 뭍으로 밀어 올리는 바람에
바닷가 일부 마을이 모래 속에 파묻혀
조개무지와 옛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았네.
제주도의 선사·원사 시대의 문화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유물들,
청동기시대 후기(B.C 300∼0)의 구멍무늬토기, 골아가리토기, 검은간토기와
제주 주호시대(A.D 0∼300)의 곽지A식 광구외반항아리형 적갈색토기,
탐라국시대(4세기∼9세기)의 회청색경질토기 ,  
시대별로 층층이 나와, 물 좋기로 이름난 과물 주위에
아득한 옛날부터 조상들이 뼈를 묻고 살아온 동네.

마을 주위엔 '곽지8경'이라 이름하는 경승지
과오름과 그 주변 경치인 곽악삼태(郭岳三台)
문필봉을 비롯한 솥바리 삼족정뢰(三足鼎磊)
소로기통 기암괴석과 주변 경치 치소암석( 巢岩石)
진모살의 고기잡이 장사어포(長沙魚捕)
남당머리와 그 물 남당암수(南堂岩水)
정자천의 아름다움 정자정천(鼎子亭川)
바둑 두는 마을 형태인 선인기국(仙人棋局)
버들못의 철새 유지부압(柳池浮鴨)이 펼쳐진다.

△ 과오름, 그 아련한 꿈의 동산

표고 155m 둘레 2,421m의 큰오름을 비롯해서
이어지는 동생 셋오름, 말젯오름으로 이루어진 과오름엔
벌써 억새가 하나둘 피어 하늘거리고 있었다.
셋오름 동녘 분화구를 바라보는 중간쯤에 자리잡은 무덤
첫손자가 귀엽다고 나의 고추를 만지며 업고 키웠다는 증조할머님 묘소와
곽지 마을을 굽어보는 큰할머님 묘소,
그리고 열일곱 어린 나이에 돌림병으로 돌아가신 작은할아버님 묘소까지
세 곳 벌초를 끝내고 소나무 그늘에 앉아
점심 식사를 하며 지나간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봄이 되어 새 풀이 돋아나기 시작하면
암소와 송아지 떼를 몰고 와 이 오름에 올리고,
학교에 갖다온 다음 소들을 찾아 풀을 뜯기다
저녁이면 몰고 오는 일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6년 동안 나는 줄곳 이곳에서 많은 꿈을 키웠다.
봄이면 피어나는 들꽃과 함께 동시를 짓고
이어 상동 따먹기와 삘기 빼 먹기
흘러가는 구름 보며 여러 가지 왕자가 되는 꿈도 꾸고
노란 배추꽃과 푸른 보리밭 사이로 보이는 마을의 아름다움
아침저녁으로 밥 짓는 하얀 연기
처음엔 한두 집에서 시작되어 차츰 마을을 덮어버린다.

어쩌면 내 고향이 제일 아름답다는 생각과
고향 사랑에 대한 감정은 이때에 싹 텄는지 모른다.
3, 4학년이 되면서 한라산을 보고
내가 큰 바위 얼굴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5, 6학년이 되면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소가 남의 밭곡식을 망쳐 물어주는 사태도 겪었다.
그러면서 나는 커서 '상록수'나 '흙'같은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는 꿈을 꾸었다.

세 오름이 감싸고 있는 분화구는 압게통이라 해서
꼴을 베고 나면 둥그런 잔디밭과 길쭉한 잔디밭이
어디 가도 뒤떨어지지 않은 두 쌍의 잔디구장이 되어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마을 학생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건 하루종일 축구하다 진 팀에서
고구마를 파다가 구워주는 내기나 겨울이면 무 뽑아다 주기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잘도 뛰었지.
오늘 증조할머니 묘소에서 바라보니
그곳은 전부 개간되어 양배추만 심어져 있고
남아 있는 커다란 바위 하나엔
조그만 소나무 한 그루가 박혀
누가 봐도 탐내는 정원석이 되었네.

옛날 풀밭이던 과오름은
산림녹화 한답시고 식목일마다 심어놓은 소나무가
온통 오름을 덮어 이제는 함부로 오르지도 못하는 오름이 되었다.
지난 봄에는 동쪽으로 겨우 기어 올라 우거진 숲을 헤치며
상동을 따먹다 더 나아가기 힘들어 그냥 내려왔는데,
이제는 소도 놀지 않고 사람도 가지 않은 오름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 큰 오지랖을 벌려
가출했던 소년을 맞아주는 어머니처럼
용서하며 소리 없이 안아주는 내 영원한 꿈의 고향.

` <2001. 9. 23. 과오름에서>

△ 사진 위는 곽지 패총(조개무지)에서 나온 곽지식 토기들이고,
아래는 이웃 마을에서 찍은 과오름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