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제2회 한라문화제 '오름오름 축제'에 부침

김창집 2001. 9. 28. 19:30

▲ 제주의 보배, 기생화산체인 오름

'오름'이란 '독립된 산, 또는 봉우리'를 이르는 제주말이며, 그것은 곧 화산섬인 제주도 한라산 자락에 퍼져 있는 기생화산들을 가리킨다. 그 수 368개, 한 섬이 갖는 기생화산의 수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으며, 설문대할망*이 한라산을 만들려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르면서 한줌씩 떨어뜨린 흙덩이가 오름이 되었다는 재미있는 전설도 있다. 그러나 지질학적으로 볼 때 대부분의 오름들은 2만5천년∼10만 년 전의 화산 활동으로 형성됐으며, 고려 목종 5년(1002)과 10년(1007)에 폭발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제주도의 오름은 그 오름을 이고 사는 마을 사람들의 상징이자 신앙의 대상이요, 죽어서 돌아갈 안식처이다. 한 때는 부당한 외세에 대한 섬사람들의 항쟁 거점 노릇을 하였고, 무고한 많은 양민들이 학살 터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일부 훼손된 곳도 있지만 저마다 제자리에서 독특한 모습으로 남아, 살아있는 자연 생태계의 보고로서 우리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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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대할망 : 제주 신화의 여신으로 거인. 한라산과 오름을 만들었다.

△ 동거미오름, 설문대할망의 걸작품

온 도민의 축제인 제40회 한라문화제 행사를 더욱 알차게 하기 위해 제2회 '오름오름 축제'가 펼쳐진다. 작년에는 들불 축제가 열렸던 새별오름과 이달봉, 그리고 도너리오름에서 펼쳐졌는데, 이번에는 오름의 여러 형태를 골고루 살필 수 있는 북제주군 '동거미오름'과 수많은 약초(藥草)가 산재해 있는 남제주군 '백약이오름'에서 실시된다. 가을 들꽃들이 만발한 이 오름들은 참가한 분들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기행문 <오름 나그네>를 신문에 연재하면서 처음으로 오름에 대한 관심을 갖고 답사하여 소개하며 오름 사랑을 실천하신 고 김종철(故金鍾喆) 선생님은 3권이나 되는 오름 책의 첫 페이지에 동거미오름을 올려놓았다. '뿔 돋친 거대한 괴물이 금방이라도 꿈틀거리기 시작할 듯한 모습으로 도사려 있는 이 오름은 오름의 창조주라는 설문대할망의 색다른 취향에 속하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느 그것과는 사뭇 다른 생김새인 것이다.

피라미드형 봉우리가 있는가 하면 돔형 봉우리가 있고, 깔때기꼴 굼부리**가 있는가 하면 삼태기꼴 굼부리가 있다. 문어발처럼 등성이 가닥이 뻗친 기슭에는 새알처럼 귀여운 오름 새끼들이 수없이 딸려 있다. 이런 것들이 드러나 있기도 하고 감춰져 있기도 하며 안에 들면 그 아기자기함에 발길이 머무는 줄 모르며 외관상의 굴곡미(屈曲美) 또한 이채를 발한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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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부리 : 분화구를 뜻하는 제주말.

▲ 김순이 선생의 '오름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서

오름에는 소리가 있다.
소멸과 생성을 순환하는 생명의 소리가 있다.
사람의 마을에 살면서 알게 모르게 귀에 쑤셔박힌 소리들의 오름을 오르는 발자국마다 하나씩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심장을 졸아붙게 하고 숨을 멎게 하고 눈앞을 깜깜하게 하던 소리의 더께들이 떨어져 나간다.
자동차의 급브레이크 소리, TV 소리, 한밤중의 불자동차 소리, 냉장고의 콤푸레서가 돌아가는 소리,
직장의 상관이 쏘는 눈총 소리, 주택가를 돌아다니는 잡상인의 소리…
원하지도 않았는데 마음과는 상관없이 달려와 귀를 때리고 정신을 흩어놓았던 그런 소리들이 떨어져 나간 그 자리에 싱그럽고 해맑은 소리들이 고즈넉하게 깃든다.
떠오르는 아침해의 뜨거운 숨소리가 들린다.
지하로 흘러가는 생수(生水)의 차고 맑은 소리가 들린다.
꽃봉오리를 실잣는 들꽃의 물레소리가 들린다.
하늘을 빗자루질하는 구름의 소리가 들린다.
달빛 아래서만 문을 여는 어떤 신비한 꽃의 소리가 들린다.
오랜 번데기의 고행 끝에 허물을 벗는 곤충의 소리가 들린다.
거미줄에 맺히는 이슬방울의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들린다. 빈약한 영혼을 고해(告解)하는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슬픔 어린 소리.

△ 가을에 피는 오름꽃들

백약이오름은 백 가지 약초가 자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목장으로 사용되어 약초가 많이 사라진 셈이지만 많은 가을 들꽃이 자기 색을 뽐낸다. 제주와 이북에서만 자란다는 피뿌리풀로부터 시작하여, 오름 전사면에 걸쳐 쑥부쟁이, 섬잔대, 딱지꽃, 패랭이꽃, 물매화, 쥐손이풀, 층층이꽃, 꽃향유, 자주쓴풀 등이 꽃잔치를 벌이고 있다. 산보 삼아 한 바퀴 둘러보다 보면 아직은 설익었지만 볼레(보리수 열매)도 따먹을 수 있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쑥부쟁이도 한 가지 색이 아니다. 짙고 연함에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작은 얼굴을 한 패랭이도 앙증맞고 물매화가 한창이다. 섬잔대와 쥐손이풀은 시기가 다 지나 빛이 퇴색되고, 미역취와 딱지꽃의 노랑색과 일명 돌가시나무라는 찔레덩굴의 빨간 열매와 잘 어울린다.

쥐손이풀과의 풀들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쥐손이풀, 털쥐손이풀, 좀쥐손이풀, 이질풀…. 이들은 모두 다년초로 산야에서 자라며, 원뿌리가 비스듬히 또는 옆으로 벋고 잎자루와 더불어 밑을 향한 털이 있다. 잎은 마주나고 잎자루가 길며 오각상 심원형(心圓形)인데, 꽃잎은 5개이고 연한 홍색 또는 자홍색이며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꽃줄기에 1개씩 달리지만 밑 부분에서는 2개의 작은 꽃줄기로 갈라져서 각각 1개가 달린다. 암술머리는 길이 1mm 정도이고 열매는 곧게 서는데, 한방에서는 현초(玄草)라고 하며 전초를 지사제(止瀉劑)로 사용하고, 한국·중국·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또, 사방에 무수한 오름들이 이 오름을 둘러 그 능선을 자랑하고 가히 오름의 왕국임을 증명해 줄 것이다. 높은오름, 문석이오름, 아부오름, 안돌오름, 밧돌오름, 체오름, 거친오름, 거슨세미, 웃선족이오름, 알선족이오름, 민오름, 칡오름, 큰돌이미, 족은돌이미, 비치미, 성불오름, 감은이오름, 용눈이오름, 손자봉, 다랑쉬, 아끈다랑쉬….

오르자. 억새들이 무수히 피어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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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위는 섬잔대꽃이고, 아래는 동거미오름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