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수필> 가을의 길목, 오름 정상에 서서

김창집 2001. 9. 6. 13:36

<수필> 가을의 길목, 오름 정상에 서서

 넓은 벌판에서 짙은 초록빛 바람이 불어온다. 습한 기운이 없어지고 서늘함이 느껴지는 기분 좋은 바람이다. 내일 모레가 백로(白露), 음력으로는 8월절이다. 이 때가 되면 밤 동안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대기 중의 수증기는 엉겨서 이슬이 된다. 봄여름 동안 농부들이 땀 흘려 지은 곡식이 무르익는 시기다. 이제 제비가 떠날 차비를 하면, 오래지 않아 기러기가 날아 올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의 억새가 만삭이 된 여인네처럼 배를 부풀리고, 수크령도 검은 수염을 내보인 지 오래다. 억새 사이로 며느리밥풀꽃이 수줍은 낯빛으로 행주치마를 들어올리면, 여기저기 쥐손이풀꽃이 별처럼 반짝인다. 숲 속에서는 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 쓰르라미와 가을을 재촉하는 귀뚜라미가 노래 경연을 벌인다. 얼핏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한결 높아졌다.


 여름 내내 방구석에서 연로(年老)하셔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님과 함께 보내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오름엘 올랐다. 미안해서 겉으로 드러내진 못하지만 지금쯤이면 벌써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잠시라도 나들이 갔다가 집으로 들어서면 당신의 얼굴엔 안도의 빛이 감돈다. 젊었을 적 당신께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바삐 돌아다닐 때 우리 어린것들이 그러했듯이. 이제 어느덧 세월이 흘러 입장이 바뀌어 버렸다.


 우리는 인생을 등산이나 연극에 비유하기를 좋아한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대단원), 참으로 그럴 듯하다. 그러면 지금 우리 어머님의 경우는 어느 단계란 말인가. 절정에서 결말로 이르는 과정은 가파르고 짧다. 그런데 어머님께서는 절정기가 끝나고 일손을 놓은 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옛날에 사주(四柱)를 봤는데, 백수(白壽)를 넘길 거라고 했대서 '빨리 못 죽엉 어떵 허코'를 되뇐다.


 세월이 흐름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계절의 변화는 나이테를 만들어내어 어느 날 문득 흰머리가 돋아나고 작은 글씨가 안 보이면서 우리를 적이 당황하게 한다. 우리는 이 갱년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살려 의연히 대처해 나가야 한다. 저 벌판에 막 피기 시작한 쑥부쟁이처럼 겨울을 넘기고 봄, 여름까지 견디어내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 제민일보 2001년 9월 6일자 <에세이 릴레이>

 



* 병곳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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