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아직도 가을인 남녘 오름들

김창집 2006. 12. 4. 02:56

 

--토산봉, 자배봉, 넉시악, 여절악 답사기

 

 -- 토산봉 오르는 길

 

▲ 누가 제주도를 좁다고 했는가

 

 2006. 12. 3. 일요일. 흐리고 비.
 어젯밤 베트남과의 그 잘난 아시안 게임 축구를 보느라고 잠잘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전 게임 중계를 다 보고 자느라 늦잠을 자서, 전화를 받고서야 아침도 못 먹고 부랴부랴 모이는 장소에 가보니, 13명이 참가 3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 좌보미와 백약이를 향해 막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비가 조금 내리기 때문에 풀밭 오름을 택한 것이었다.

 

 늦게 나온 놈이 뭐라 할 수도 없고 딱이 마음에 두고 있는 곳도 없어 앞차에 선임 탑승하고 동부관광도로('번영로'라 이름 바꿨다던가?)에 접어드는데 빗방울이 더욱 잦아지고 동녘하늘이 어두컴컴하다. 그래도 오름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그냥 현장에서 가서 의논하기로 작정하고 현장에 도착하니, 비가 제법 굵어져 있었다.

 

 의논 결과, 그냥 계획대로 진행했다가는 풀밭에 신발과 옷이 다 젖어 과히 신통하지 못하니, 저 남쪽 지역에 공원처럼 산책로를 터놓은 오름으로 가기로 의견을 모으고 앞장섰다. 동쪽으로 조금 나아가다 성읍민속마을로 이르는 길을 거쳐 마을을 통과하는데, 조금 밝은 기운이 돌며 비가 가늘어지기 시작하더니, 16번도로로 토산리 입구에 들어설 때는 비가 왔던 흔적도 거의 없다.

 

 -- 앞 세 오름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던 백량금

 

▲ 가을 색 그대로인 토산봉
 
 중산간도로인 16번이 지나가는 토산1리에서 오름 서쪽으로 난 토산2리로 내려가는 길을 조금 가다 보면 왼쪽에 망오름 입구 표지판이 있고, 조금 더 가면 간이 주차장과 토산1리라는 표지석과 쉼터가 있다. 거기에 차를 세우고 같은 제주도에도 이렇게 날씨 차이가 날까 하는 얘기를 나누면서 오름에 오른다. 토산봉(兎山峰)을 '망오름'이라 하는 것은 조선시대 이 오름 정상에 토산망(兎山望)이라는 봉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봉수(烽燧)는 제주도를 빙 둘러 해안 가까운 오름 25곳에 시설을 만들어 놓고 병사가 지키면서 적의 침입을 알리는 곳이었다.

 

 아담하게 뚫린 숲길에 들어서자 땅에 적당히 떨어진 낙엽의 촉감으로 발길이 가볍다. 빨갛게 익은 백량금과 자금우의 열매가 도열해 서서 어서 오란 듯이 우리를 맞고, 천선과나무 같은 나뭇잎들은 노랗게 물들인 채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숲 사이를 뚫고 들어온 바람이 가을바람처럼 살랑살랑 '당신네들은 오늘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 아직도 남아 있는 예덕나무 단풍

 

 남제주군 표선면 토산리 산 13번지에 자리한 표고 175.4m, 비고 75m, 둘레 2,829m, 면적 398,823㎡, 저경 902m의 토산봉은 나지막하면서도 숲이 우거져 지형이 복잡하게 보이는데, 처음에 오를 때는 남동쪽으로 우거진 숲을 헤쳐 길쭉한 등성이를 오갔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서쪽 길에서 산책로를 내 쉽게 접근하도록 해놓은 동쪽과 서쪽으로 벌어진 2개의 말굽형 화구로 이루어진 복합형 화산체이다.

 

 오름 북동쪽에 토산봉 알오름이라 불리는 독립 화산체가 있으나 이 오름과는 무관하며,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어 여기서는 '북망산'이라 부르고 있다. 풀이 무성한 정상 봉수터에서 설명을 간략히 하고 몇 가지 체육시설을 뒤로하며 내려온다. 과거 이곳에는 춘란(春蘭)이 그득했는데, 멋모른 할머니들이 모두 뽑아다 5일 시장에 내다 팔아버렸기 때문에 그게 두고두고 아쉬워진다. 10여 년도 더 지난 지금은 그 때 남겨진 뿌리에서 하나둘 잎이 돋아난 것이 보이는데, 하루빨리 그 때처럼 복원되길 바랄 뿐이다.   

 

 -- 자배봉에서 만난 부도 모양의 탑

  
▲ 자배봉에 올라 무지개를 보며

 

 기분 좋게 오름 하나를 오른 일행은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다음 행선지인 자배봉에 가려고, 다시 16번도로로 나와 서쪽으로 달린다. 신흥리를 거쳐 의귀리와 한남리를 지났을 때 곧바로 오른쪽에 보이는 오름이 자배봉이다. 바로 길옆에 승용차 10대쯤 세울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3년전쯤 능선을 한 바퀴 도는 산책로를 만들어 타이어로 만든 발판을 깔아놓았기 때문에 비 올 때 우산을 들고서 다닐 정도다. 

 

 비스듬히 뽑아놓은 산책로로 앞장서 오른다. 30년은 족히 넘었을 밤나무 밑으로 난 길섶엔 백량금이 제법 굵다. 가끔씩 참나무가 섞이고 그 밖으로는 삼나무와 소나무가 보인다. 자배오름 역시 봉수가 있었대서 '망오름'이라고도 하며, 지도에는 자배봉(資輩峰)으로 보통 표기된다. 남원읍 위미리 산143번지 일대에 표고 211.3m, 비고 111m, 둘레 2,829m, 면적 440,293㎥, 저경 816m의 규모다.

 

 -- 타이어 발판을 깐 자배봉의 산책로

 

 자배봉이란 이름은 구실잣밤나무의 제주어인 '조밤낭'이 이 오름에 많아서 붙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과거에는 오름 동쪽자락으로 난 길을 따라가 북쪽 기슭 표고버섯 재배지로부터 정상에 올랐는데, 지금은 남쪽으로 바로 오르는 길도 있다. 능선에 오르자 바로 부도탑 같이 쌓아올린 돌탑이 반긴다. 시계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그곳에는 탑처럼 만든 것이 몇 기 더 있다.

 

 아직도 이 오름에는 가을이 멈춰 있다. 천선과나무와 예덕나무가 노란 잎사귀를 달고 오솔길을 환히 밝히고 말오줌때 열매도 그대로 달린 채다. 화구 내부사면이나 바닥에는 온통 삼나무, 해송, 상수리나무, 보리수나무, 편백나무, 예덕나무, 자귀나무, 붉가시나무, 찔레덤불, 청미래덩굴 등과 어우러져 울창한 숲을 이룬다. 분화구 안에 들어가 보면 옛날 개간해서 농사를 지었던 흔적이 남아 있고 오래된 밤나무는 햇볕을 못 쬐어서인지 키만 훌쭉하게 자라고 열매는 열리지 않는다.

 

 동북쪽 봉우리에 이르렀을 때 주변이 탁 트여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봉수터는 가시덤불에 싸여 윤곽조차 알 수 없는데, 그 대신 측량 기준점과 해설 간판이 서 있다. 다시 시계 방향으로 계속 돌아 남쪽 능선에 이르렀는데 고인돌이 두 기가 서 있다. 이치적으로 생각하면 이 위까지 고인돌이 있을 리가 없는데, 해설판까지 세워놓은 걸 보면 이해가 안 간다.

 

 -- 넉시악에서 만난 붉나무 단풍

 

 남쪽 봉우리에는 앉아 쉴 수 있을 정도로 평평하고 둥근 터가 있다. 이 자리에 앉으면 한라산은 물론 남쪽 바다까지 조망할 수 있고 분화구 안쪽도 조금 보인다. 한라산은 구름에 가린 채 서쪽 자락만 나타나고 그 옆으로 무지개가 떠 있다. 아! 이렇게 오름에 올라 여유를 갖고 무지개를 찬찬히 들여다 본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바쁜 일상에 쫓겨 자신을 모르고 엄벙덤벙 살아온 과거가 조금은 부끄럽다.

 

 아침을 못 먹었기로 펼쳐놓은 계란 삶은 거랑 고구마 삶은 거랑 맛있게 먹으면서 조류 독감 얘기를 하려다가 무지개 쪽으로 말을 돌려버린다. 지금 여기서 무거운 주제를 다룰 필요가 있을까 해서였다. 향긋한 매실주를 한 모금 입에 물고 무지개를 바라보다 바다 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바다 위에 배 몇 척이 떠 있다. 아침을 안 먹은 것을 알고 내 앞에 안주로 내미는 돼지고기 적(炙)과 귤과 토마토를 번갈아 먹으며 모처럼 행복을 느낀다.   

 

 --자배봉에서 보았던 무지개

 

▲ 넉시악 주변의 잘 익은 귤들

 

 얼마 전에 딸의 결혼 피로연에 와주었다고 오늘은 감사의 점심 대접하러 나왔다는 한 여자 회원 남편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조천읍 교래리 토종닭집에 예약까지 해 놓았다는 바람에, 지금 먹은 새참이 소화가 안 되었기로 그쪽에 가서 오름 하나를 더 오른 다음 가자면서 교래리로 향한다. 그러나 남조로 고사리 축제장에 이르러 보니 비가 세차게 오고 있었다. 조금 더 가서 차를 세우고 의논 후 다시 돌아와 비 안 오는 곳의 오름에 오르고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번엔 의귀리를 지나 다리 거너에 자리잡은 넉시악을 목표로 차를 몰았다. 이곳저곳에 아직 따지 않은 잘 익은 귤밭이 늘어서서 우리를 즐겁게 한다. 한라산 북쪽에 제주시의 것은 먼저 따서 팔고 이곳은 추위가 늦기 때문에 수량을 조절할 겸 나중에 따기 때문에 안 딴 곳이 많은 것이다. 요즘 FTA로 시름에 빠진 농민들을 살리려는 뜻 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요즘 출하되는 것은 다 팔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 넉시악 입구에서 만난 천남성 열매

 

 넉시악은 남원읍 의귀리 531번지 일대에 있는 나지막한 오름으로 표고 146.2m, 비고 56m, 둘레 1,416m, 면적 128,854㎥, 저경 498m의 규모이다. 남서에서 북동으로 다소 평평한 등성마루를 이루고, 남동사면으로 골이 패어 내렸으며, 북서사면에 넓고 얕은 화구가 벌어졌으나 숲에 덮여서 화구라고 할 만큼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다. 서쪽 능선 아래로 봉긋하게 솟아 있는 곳을 마을에서는 이를 새끼오름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름 옆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가는데 귤 향기가 향긋하다. 정상 서쪽 바로 아래에는 이동통신의 높은 철탑이 박혀 있다. 그 옆을 돌아 능선으로 오르는데 잘 익은 천남성 열매가 반긴다. 이곳에도 여기저기 백량금과 자금우의 열매가 빨갛게 익었다. 이곳 오름 기슭에는 마을사람들이 본향당으로 모시는 넉시오름널당(널당)이 있어 신목(神木)인 팽나무 노목을 돌담으로 두른 제터에서 해마다 제를 지낸다.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이다.

 

 능선을 돌아 우거진 숲을 걷는다. 오름 전사면 중턱까지 돌아가며 감귤원이 조성되었고, 그 위쪽으로는 해송, 사스레피나무, 동백나무, 참식나무, 생달나무, 아왜나무, 소귀나무, 대나무 등이 어우러져 숲을 이루고 있다. 거의가 상록수여서 진초록 사이사이에 낙엽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이 무늬처럼 보기 좋다. 너무 작은 오름이어서 아직 예정된 시간이 아니라고 다시 하나 더 오르기로 하고 내려왔다.   
 

 -- 넉시악에 오르는 일행들

 

▲ 앞에 오른 오름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여절악

 

 처음에는 웅악(雄岳)을 생각하면서 동쪽으로 진행하다가 유턴할 곳을 지나쳐 버려 지금까지와 전혀 분위기가 다른 풀밭 오름인 여절악으로 향했다. 여절악(如節岳)은 여쩌리, 예절이오름이라고도 부르는데 남원읍 신흥리 산18번지 일대에 자리해 있으며, 표고 209.8m, 비고 50m, 둘레 1,445m, 면적 110,552㎥, 저경 462m의 규모이다. 등성마루는 동서로 완만하고 낮게 이어지며, 남쪽으로 크게 벌어진 말굽형 굼부리를 이루고 있다.

 

 남원읍 신흥리 신흥공동목장 앞에 위치해 있지만 수망리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군도(郡道)를 따라 신흥리 방향으로 3km 정도 들어간 곳 비스듬한 사거리에서 다이너스티골프장 가는 길을 따라 4km쯤 들어가다 보면 길 왼쪽으로 보이는 풀밭 오름이 바로 여절악이다. 골목길로 들어서면 풀을 베어 실어 나르느라 터놓은 길이 비스듬히 오름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풀을 베어놓은 곳으로 들어가다 잘 익은 보리수 열매를 만나 몇 알씩 입에 넣으니 새콤하면서도 달콤하다. 영양실조인지 잎이 물든 사스레피나무 열매를 찍고 늦게 도착해보니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초소에 있던 산불감시요원을 만났다. 작년에 만났을 때는 좀 싫어하는 눈치이더니, 오늘은 좀 누그러졌다. 인사를 하고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오름에서 내려왔다. 비를 피해 다닌 하루, 마지막은 교래리에서 토종닭으로 즐겁게 마감했다.   

 

 --분위기가 전혀 다른 여절악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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