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어후오름과 거친오름

김창집 2001. 11. 8. 18:02
★☆★별들의 잔치 --- 어후오름

가을이 지나가는 산골짜기에는
가끔씩
빨간 별을 가득 매단
애기단풍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 적마다
빤짝거리고 있었다.
으스스한 한기를 녹이며
마지막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버석거린다고 할까 바스락거린다고나 할까.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제주조릿대가 정상까지 이어져 있어 이번 어후오름 산행은 이 걸 밟는 소리로 시작되고 끝났다. 가끔 조릿대가 뜸한 곳에 떨어져 쌓인 낙엽들이 발목을 즐겁게 해줬다. 꽝꽝나무가 정갱이를 긁어대고 굴거리나무가 이따금 눈을 어지럽혔지만 기분 좋은 산행이었다.

차라리 쌀쌀한 기온은 덥지 않아서 걷는데 좋은 조건이 되어 주었다. 흠이 있다면 날씨가 흐려 먼 곳을 전망할 수 없는 것 하나. 그러나 어쩌랴.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면서 자연을 대하고 있으면 인간도 하나의 자연인 것을. 가끔 주목(노가리)이 있어 아직도 이곳은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앞장서 걷다가 뒤에서 조금 지친 사람이 있는 것 같아 계곡에서 쉬기로 했다. 더구나 제주넷 식구들이 초행길이라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10시. 산길로 접어든지 30분이 된 셈이다. 조그만 냇가에다 장소를 정하고 쉬러 들어섰는데, 맑은 물이 고여 있다. 떠 있는 낙엽 때문에 물은 더욱 맑아 보였고 위에선 똘똘똘 물소리가 낭랑하다.

삭은 나뭇가지에서 솟아난 이름 모를 버섯이 매화처럼 곱다고 촬영하느라 열중이다. 온 산을 뒤덮은 나무는 벌써 낙엽을 떨구고 그 중에 표고 재배 때 쓰이는 참나무와 서어나무만 잎을 가지고 있어 노란 단풍도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서어나무는 추운데 잘 자라는 자작나무과여서 조금 오래 견디는가 보다. 이 나무는 특히 줄기 부분에서 기이한 형태를 보이는 것이 많다.

큰 나무들 아래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의 세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늘에서만 자라다가 위의 나무들이 나뭇잎을 떨구어버리자 이제는 맘대로 햇빛을 받아들여 숲 속의 공주가 된 애기단풍의 고운 자태가 곳곳에서 탄성을 발하게 한다. 가끔은 설악산이나 내장산에서 온통 붉게 물든 단풍나무 숲의 터널은 별 생각 없이 지나쳐는 봤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음미하기는 처음이라고 하니까 제주넷 고 운영부장도 동의한다.

왼쪽에 계곡을 끼고 계속 올라 1시간이나 되었을까. 조그만 동산을 올랐는데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곳이 밋밋해서 도무지 실감이 안 난다. 사방은 싸늘한 습기를 버금은 안개가 피어올라 50m밖을 가늠할 수 없다. <오름나그네>에는 '4개의 봉우리가 기복을 이루고 있고, 그 안의 동쪽 안부는 꽤 높고 가파르며, 특히 계곡에 면한 북서 사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반해 남서 사면은 대체로 완만하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남서쪽 사면이라고 생각하고 나침반에 나타난 북쪽 방향으로 올라간다. 10분 정도 올랐을까 진짜 남서 사면이 나타났다.

계속 능선을 따라 돌며 올라가니 정상은 거기에 숨어 있었다. 언뜻언뜻 안개 사이로 보이는 절벽처럼 가파른 산비탈. 여기서 요기를 하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 본다. 행여 덥다고 옷을 벗어 감기에 들까 걱정하며 갖고 온 음식을 풀어놓으니 산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진수성찬이다. 매번 우리를 즐겁게 하는 구 박사 사모님의 유부 초밥과 김 선생님의 약밥, 그리고 제주넷에서 오늘 처음 오면서 인사차 싸온 수십 줄의 김밥까지.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다.

그 성의에 감동을 받았을까. 하늘은 차츰 안개를 걷어내고 조망(眺望)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나는 오름. 성널오름이었다. 안개 때문에 북쪽인 줄만 알고 있던 곳이 남쪽이었던 것이다. 북쪽으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나타나는 불칸장오리, 물장오리, 쌀손장오리. 욕심 같아서는 불칸장오리에 가고 싶었지만 계곡을 건너기 힘들어 다음 답사로 넘기기로 했다.

비록 비고 116m밖에 안 오른 셈이지만 해발 1,017m의 높은 지대여서 차갑고 상쾌한 공기로 가슴을 깨끗이 씻어내고 빨간 단풍잎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며 조심스레 내려 왔다. 2시 15분.


∬∬∬이름처럼 거친 --- 거친오름

4시10분. 우리가 거친오름에 오르게 된 것은 순전히 명도암 목장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때문이었다. 갈비우거지탕과 비빔밥을 먹는 식당 유리창 너머로 거만하게 솟은 오름이 우리를 향해 손짓했다. 3년 전에 한 번 올랐던 오름이지만 날씨는 어둑해가고 다른 곳을 가기는 무리여서 오름의 부름을 도저히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새로 짓는 유스호스텔 정문 옆으로 차를 나란히 세우고 철조망을 건너 조심조심 기어 들어갔다. 오래된 무덤이 있어 관찰하고 나니 보리수가 유난히 많다. 금년엔 해거리를 하여 이렇게 많은 볼레낭에 볼레가 한 방울도 안 붙었다. 자연의 섭리니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가만히 보니 많은 건 보리수만도 아니다. 보리수와 찔레가 엉켜 있는 곳에 사이사이 밤나무가 많이 보인다. 아마도 조림해서 가꾸지 않다 보니 야생처럼 변했나 보다. 초가을에 한번 들러봄직도.

정말 거친오름은 그 이름이 갖는 의미를 우리에게 확실히 몸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철이 늦어서인지 들꽃 한 송이 보이질 않는다. 가시덤불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큰오름과 작은오름이 마주치는 곳으로 들어갔다. 보통 중산간에 있는 오름의 들판은 목초지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그렇지가 않다. 가시덤불의 곳곳에 청미레덩굴, 덜꿩나무가 한데 얼려 자라고, 풀밭을 이루는 풀은 목초를 주축으로 띠와 고사리가 많이 섞었다.

중간까지 올라왔는데 길은 거칠고 사방은 어둑해진다. 모처럼 구 박사님이 앞장서 험한 길을 잘도 개척해 나간다. 억새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정상이 눈앞에 다가왔다. 오늘 이 오름에 오른 우리들에게 제일 위안을 준 것. 그래 억새다. 정상 남쪽 사면을 을 수백 평 가량 점령한 채 아직도 한창 피어오른 이삭을 자랑하고 있는 억새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가시에 긁힌 것 이상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날씨만 좀더 좋았더라면 몇 번의 탄성이 터졌을 것이다.

날도 어두워 가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짜증날 것 같아 우리는 북쪽 숲을 바로 뚫기로 했다. 활엽수가 빽빽한 북쪽 능선에서 마지막 선까지는 쉽게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러나 철조망으로부터 가시덤불이 이어지는 곳을 뚫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모처럼 여전사 김 선생님이 불쑥 나서서 날렵한 몸매로 철조망을 통과하고 온 몸으로 가시덤불을 헤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시에 찔려 면장갑 위로 솟아오른 피를 가리키더니 참으로 대단한 용기다. 덕분에 우린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5시 반. '거친 오름!' 끝까지 이름 값을 한 오름이었다.△ <2000년 11월 12일 일요일>


*사진은 어후오름에서 본 단풍과 불칸장오리오름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