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청산별곡(靑山別曲)

김창집 2001. 11. 14. 09:30
<볼레오름과 이스렁오름 답사기>
--- 2001년 11월 4일 일요일 맑음

▲ 오름은 계절 따라

오름은 계절에 따라 그 개성을 달리 한다. 봄꽃이 빛나는 오름이 있는가 하면, 여름에 그 녹음(綠陰)을 자랑하는 오름, 가을에 한껏 그 진가(眞價)를 발휘하는 오름, 겨울이 되서야 그 가슴을 여는 오름이 있다. 사실은 지난 주 일요일에 볼레오름과 이스렁오름에 오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날 비가 너무 왔고 아침에 한라산 쪽 시계(視界)가 불분명하여 다음 주에 오를 따라비오름과 모지악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그 바람에 그 날 따라비에 올랐던 일행들은 멋진 억새의 장관을 만날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처럼 하늘이 맑고 한라산이 훤하게 트였다. 사실이지 지난 10월은 여러 가지 행사로 맘놓고 오름을 즐기지 못하였었다. 그래, 오늘은 단풍 소식도 궁금하고 여러 가지 열매가 어떻게 익었는지 보고 싶어서, 그런 조건을 두루 갖춘 볼레오름과 이스렁오름에 오르는 쪽으로 유도하기로 했다. 우리 모임은 2·4주가 정기 산행으로 1년 계획이 서 있고, 1·3주는 특별한 일이 없는 회원끼리 만나 데리고 온 1일 회원들과 함께 날씨와 계절에 따라 가고 싶은 오름을 오르는 편이다.

오늘 참석한 회원은 14명, 나는 아침에 작정한 대로 볼레오름과 이스렁오름을 조심스럽게 들먹였더니, 모두 대찬성이다. 그렇다면 준비가 바쁘다. 웬만한 오름은 하나 또는 두 개를 오르고 나서야 점심 시간이 되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맛있는 토속 음식점을 찾아 해결할 수 있지만, 오가는데 시간이 걸리는 이 오름 둘을 넉넉히 즐기려면 점심 준비를 잘 해야 하는 까닭이다. 서둘러 점심 준비를 하도록 하여 영실 입구 주차장으로 출발했다. (08:30)

△ 한라산 기슭, 영실(靈室)을 마주한 오름

서귀포시 하원동 산1-1번지 일대에 자리한 표고 1,374m, 비고 104m의 볼레오름[佛來山]. 한라산국립공원 영실매표소 서북쪽에 위치한 이 오름은, 1100도로 탐라각 휴게소에서 볼 때 한라산 정상봉에서 이어지는 산줄기를 등에 업고 가까이 좌우로 3개의 오름을 둘러볼 수 있는데 왼쪽이 쳇망오름, 가운데 기와 지붕 모양의 이스렁오름, 오른쪽이 볼레오름이다.

볼레오름은 행정구역상 서귀포시 하원동 관할이나 북동사면 일부가 애월읍과의 경계에 걸쳐져 있고, 북동쪽 봉우리와의 사이에 평평한 등성마루는 북서향으로 넓게 벌어진 말굽형 화구를 이루고 있다. 남사면 중턱에는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알려진 존자암(尊者庵)의 옛터와 약수터가 있고, 남사면에는 적송(소나무)이 영실 주변과 연계되어 대단위 군락을 이룬다. 또, 서사면의 기슭 자락은 꽝꽝나무, 주목 등과 갖가지 야생화들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피어난다.

점심 준비를 하느라 이곳저곳 들러 오느라 한라산국립공원 영실 관리사무소가 있는 매표소 입구에 도착한 것이 09시 50분. 존자암지를 복원하는 중창불사를 위해 많은 기와가 내려져 있다. 이 기와는 존자암으로 가는 오솔길을 따라 설치해 놓은 모노레일을 통해 올라가게 된다. 엄청나게 많은 양인데 대부분의 건자재가 이 레일로 올라간다. 일전에 들렀을 때는 주춧돌을 비롯한 많은 건자재를 볼 수 있었고, 기둥과 대들보로 사용될 자재는 헬기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절을 짓느라 큰길을 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모두 채비를 차리고 음수대에 가서 물 한 모금씩 마시고 존자암 오솔길을 따라 오른다. 보리수나무의 제주 이름 볼레낭이 많다고 해서 볼레오름이라고 이름했다는데, 숲속에서 볼레나무는 별로 눈에 띄지 않고 가끔 작살나무만 매혹적인 보랏빛 열매를 매단 채 서 있다. 암자의 법정(法正) 주지 스님은 불교가 전해진 존자암이 있기 때문에 불래악(佛來岳)이라고 단언한다. 이 스님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부도를 닮은 사리탑 하나 덩그마니 남았던 이 암자에는 지금, 집이 하나 둘 지어져 얼마 없으면 예전의 모습보다 더 훌륭한 암자가 들어선다.

암자가 보이는 곳까지 가서 오른쪽 숲 속 제주조릿대 사이로 희미하게 난 등산로를 따라 곧바로 정상으로 오른다. 곳곳에 으름과 머루, 다래, 청미래 등 덩굴식물이 나무에 엉켜 있다. 노루 몇 마리가 우리의 인기척에 놀라 줄달음질 친다. 그들이 사라진 곳으로 길을 찾아 나섰다. 꽤 가파른 길을 한 20분쯤 올라 조릿대가 뜸한 곳을 골라 쉬어가기로 했다. 팥배가 빨갛게 익은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잎이 진 나무 사이에서 자태를 뽐낸다.

△ 머루랑 다래랑 먹고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성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든 새 본다 물 아래 가던 새 본다
잉 무든 장글란 가지고 물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이링공 저링공 하여 나즈란 지내와숀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또 엇더 하리라
얄리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어디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로라
얄리얄리 얄랑성 얄라리 얄라
` (고려속요 '청산별곡' 6~8연 생략)

사람들은 언제나 일상의 탈출을 꿈꾸며 산다. 꽉 짜여진 일상을 소화하며 기계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든, 이루어지는 일 없이 계절이 바뀌어 감을 초조해 하는 사람이든,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가 변화를 모색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우리는 불확실성의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단 하나 붙들 수 있는 것은 정(情)이라는 끈이 아닌가 한다. 고려시대 어느 젊은이. 정을 주었다가 배신을 당했다. 산에 올라와 머루랑 다래랑 따먹으며 사람 냄새를 그리워한다.

사실 나도 10월의 주말을 모두 행사를 치르면서 보냈기 때문에 오늘 하루만큼은 모든 세상 관계를 잊고 아무런 부담 없이 자연에서 숨쉬고 싶었다. 잦은 비 날씨와 찬바람 때문에 단풍은 모두 져버려 조금 황량했어도 아직도 남아 버티고 있던 노란 나뭇잎들과 그들이 1년 동안 이루어놓은 보람찬 열매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루비처럼 반짝이는 소중한 보석들이 더 아름답고 찬란할 수 있었던 것은 주위의 나뭇잎들이 열매가 더욱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도록 조용히 떨어져 뿌리를 포근히 덮어줬기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는지?

▲ 속세를 떠난 곳, 볼레오름과 이스렁오름

잎이 다 져버린 덕분에 다래와 머루가 맨 몸으로 드러나 쉽게 따먹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 맑은 공기를 마음껏 호흡하면서. 한라산 봉우리와 영실의 기암들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떨어지다 만 나뭇잎과 루비빛 열매들을 마음껏 탐닉하면서 오름 기슭과 들판을 헤매었다. 어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생각되는 하늘의 별처럼 빨간 팥배를 가득히 단 나무를 바라보기도 하고 나무에 올라 머루와 다래를 따먹기도 하고 버걱이는 나뭇잎들을 밟기도 하면서 가슴에 남은 앙금들을 씻어냈다.

볼레오름 정상.(11:20) 주위는 온통 단풍이 불타버려 앙상한 가지만이 남았다. 그 가운데 영실 대피소 주변의 푸른 소나무 숲과 곳곳에 늑장을 부려 그 존재를 나타내는 활엽수가 드문드문 노란 옷을 입은 채로 서 있다. 저 영실(靈室)로 흐르는 사람들의 행렬. 여기서 보면 영실은 한 숟갈 움푹 떠내 버린 범벅 사발 같다. 어떤 학자들은 저것을 분화구로 보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정상에서 입가심을 하고 다시 능선을 따라 내려간다. 팥배나무, 윤노리나무, 참빗살나무, 말오줌대 같은 것들이 빨간 열매를 매달고 새들을 유혹하고 있다. 저들은 종족 보존을 위해 현란한 색과 달콤한 과육을 미끼로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정금나무와 산딸나무 열매는 이미 그 시기를 놓쳤는지 다 떨어지다 시든 열매 몇 개만 매달려 있다. 따서 입에 넣으니 당도가 꽤 높다. 북쪽 능선 내려가는 곳에서 주목나무의 빨간 열매를 만날 수 있었다. 항암 성분이 있다는 이 열매를 입에 넣으니 소나무류 특유의 향기와 함께 달착지근한 맛이 먹을 만하다.

볼레오름과 이스렁오름 사이 계곡 위로 나 있는 옛 등산로를 따라 영실 쪽으로 가다가 이스렁오름으로 향한다. 사람 출입이 별로 없다보니 옛길은 거의 막혀버려 헤어나기 힘들다. 웬일인지 이스렁으로 가는 길을 빨간 페인트로 표시해 놓았다. 이곳 저곳에 돌멩이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 위를 조릿대가 덮여 있어 잘못 딛었다가는 낭패 보기 쉽겠다. 작년에 정금과 산딸을 가득 달고 발목을 잡았던 나무들은 이제 잎이 다 져버려 무슨 나무인지 구별도 잘 안 간다.

숲을 지나는데 1년 사이에 길이 완전히 막혀버려 길을 찾느라 혼났다. 산이든 사람이든 내왕이 없다보면 소원해지는 것은 마찬가지. 겨우 벌판을 찾아 다시 오름에 오르는데, 이 길도 마찬가지로 험난하기 그지없다. 작년에 한라구절초 한 송이 외롭게 피어 있던 곳을 지나며 찾아보았으나 때가 늦었는지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시로미도 열렸던 나무인지 안 열렸던 나무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 애월읍의 정상 이스렁오름에 앉아 비상용으로 남겨둔 술 한잔을 돌리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길, 시기를 놓치면 모든 것이 이처럼 허망할 수 있다는 것을 무섭도록 실감한다.

▲사진 위는 머루, 아래는 다래(동그라미 안은 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