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름 오르기를 어찌 골프 치는 것에 비하랴만
: 몇 년째 오름을 다니다 보니, 나도 퍽 이기적(利己的)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처음에는 데려가 주기만 해도 감지덕지하여 어딜 가든 신이 나고 재미있었는데, 이제는 될 수 있으면 가고 싶은 곳이나 안 갔던 곳을 선호(選好)하게 되었으니, 사람의 마음이란 게 자기 중심이고 간사하달 수밖에. 그리고, 오름 오르는 자세도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맑은 공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사람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 나누는 재미도 좋고, 새로운 곳을 찾는 맛도 그만이었지만, 지금 와서는 한 주만 걸러도 궁금하고 몸이 개운치 않다. 골프 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럴 건가?
: 그래서 '남은 돈을 많이 들이면서 골프도 치는데, 내가 신경 조금 쓰면 가고 싶은 오름 못 오르랴.' 하는 심정으로 될 수 있으면 토요일에 볼 일을 다 보아두고 기어이 오름엘 올라야 직성이 풀린다. 사실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 골프장은 잔디가 곱고 푹신푹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빛 좋은 개살구다. 기온이 조금 올라가면 땅속에 잠적해 있던 비료 성분과 살충제 그리고 제초제가 뒤엉켜 올라와 모르는 사이에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이 뻔하다. 그러나, 오름은 그렇지가 않다. 평탄하지도 못하고 더러 거칠거나 풀이 안 난 곳도 있지만, 맨땅은 맨땅대로 돌길은 돌길대로 걷는 맛을 더해주고 운동량을 늘려 준다. 거기다 새롭게 바뀌는 풍경을 즐기면서 삼림욕의 효과까지 거둘 수 있으니….
: 부질없는 생각에 젖어 있는데, 1100 도로 휴게소에 차가 멎는다. 얼른 복장을 갖추고는 출발이다. 한 모퉁이 접어들자마자 곰취 군락지가 나타난다. 국화과에 속하는 곰취는 원래 습한 곳을 좋아하는 봄나물로 향기가 그만이다. 그만이기보다 향기가 짙다 못해 독한 편이다. 얼마 전에 방송에 강원도 산동네 사람들이 이 곰취 뿌리를 캐다가 비닐 하우스에서 순을 키운 뒤, 화분에 심어 관광 상품으로 출하하는 것을 보았다.
▲ 재작년 이곳에서 열렸던 산 열매 축제
: 재작년 10월 둘째 주에는 이 길을 통해 이스렁오름을 올랐다. 그 날의 산행은 온통 열매 따먹었던 기억뿐이다. 정금, 산딸(틀), 주목(노가리) 열매, 으름, 다래 등 이르는 곳마다 달려 있어 가는 길을 더디게 했다. 앞으로 그렇게 먹거리가 풍성한 산행이 두 번 다시 있을 것인가. 나무에 열매가 없어서인지 같은 길인데도 딴 길처럼 보인다.
: 오늘은 대신 분홍색 병꽃이 더러 초록색 잎사귀 속에서 수줍게 웃고 있다. 인동과에 속하는 병꽃은 처음은 주황색이지만 점차로 붉어진다. 인동꽃이 처음에 하얗다가 점차로 노래지는 것과 같은 성질이다. 사람이 많이 안 다녀서 그런지 갈대가 유난히 우거지고 물이 골을 파 놓아 여기저기 함정이 도사려 있다. 울퉁불퉁한 바위도 조릿대 속에 매복해서 무릎과 발목을 노린다. 회원 중 한 사람이 지지난 주 선작지왓에서 다리를 다쳤던 기억을 상기시키면서 조심 운행을 당부해 본다.
: 잠시 조릿대가 없는 자리에 옥잠란 몇 포기가 소담스럽게 꽃대를 밀어 올려 아직은 좁쌀만큼 하지만 꽃봉오리를 준비하고 있다. 짚신벌레라 불리는 매미나방 유충이 참나무나 사오기 등속의 나뭇잎을 갉아먹다 자벌레처럼 줄에 매달려 사람을 귀찮게 한다. 광훈 씨가 종아리에 조인트를 그것도 한 대가 아니라 같은 곳에 두 번 깨였다고 엄살이다. 옷을 걷어 보니 상처가 아프기도 하겠다.
△ 오늘의 주제 꽃은 '큰앵초'로 정해야 하나
: 조그만 냇가에 이르러 잠시 쉬기로 했다. 멀리서 짙은 분홍색 꽃무더기가 손짓을 한다. 큰앵초였다. 선작지왓에서의 주제 꽃은 설앵초였는데, 보름이 지난 지금 설앵초는 다 지고 아무래도 오늘의 주제 꽃은 큰앵초로 정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오름엘 다니다 보면 어느 오름이든 당시 그 오름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 멋대로 그 날의 주제 꽃을 지정(?) 공포(公布)해 왔는데, 오늘은 딱이 이것이다 싶은 것이 없어 망서려 진다. 그만큼 볼레오름의 오지랖이 넓은 까닭이리라.
: 키 큰 나무 비탈을 걷노라니 조릿대가 잠시 사라지고 부엽토가 나온다. 은대난초가 꾸부정하니 큰 키를 세우고 꽃망울을 머금고 있다. 옆에 처음 보는 맛버섯이 있어 부회장님께 귀뜸을 하니 삼각대를 세우고 찍느라 부산하다. 머리가 방울방울 앙증맞게 모여 있다. 카메라 렌즈 속을 들여다 본 회원들이 신기하다고 야단들이다. 그렇게 노출 상태나 조리개의 조절에 따라 렌즈 속은 요지경이 되고, 거기서 예술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 봄의 전령사인 박새도 어느덧 고개를 들고 어줍잖게 꽃망울을 머금었다. 귀박쥐나물잎이 진짜 박쥐처럼 인상적이다. 서어나무 노거수(老巨樹)에 올라 자연의 질서를 배운다. 그만 하면 몇 백년을 살았을 나무의 다섯 가지 중 하나가 고목이 되어 벌 구멍인지 좀 구멍인지 숭숭 뚫려 있고, 위로 솟은 가지엔 바위 수국이 칭칭 감겼다. 그 다섯 가지의 중심부엔 단풍나무가 나서 열 살은 되었을 성싶다.
: 나무 아래쪽에서는 개족도리와 노루귀를 구분하느라 야단들이다. 이 둘은 얼추 보면 얼룩무늬와 색이 비슷하게 생겼지만, 한 줄기에 잎사귀가 하나만 나 있는 것은 개족도리고, 클로우버처럼 한 줄기에 세 잎이 달린 것이 노루귀다. 옆에 세바람꽃이 앙증맞게 피어 있다. 진짜 바람에 꺼질 것 같다.
▲영실(靈室)의 진면목이 여기서야 다 보인다
: 나무 사이로 이스렁오름의 육중한 모습이 나타났다. 언제 어느 쪽에서 보아도 안정된 모습이다. 정상에 철쭉이 무리 지어 손짓한다. 당장 광훈 씨가 저기 가자고 욕심낸다. 내가 가을로 연기하자고 달래보았지만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 숲을 벗어나 트인 곳에 서니 더 찬란한 모습으로 유혹한다. 영실 벌판도 온통 철쭉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 섬매발톱나무가 잎사귀 사이로 노랗게 꽃망울을 피워 올리고 있다. 매자나무과에 속하는 매발톱나무의 변종으로 제주도에만 자란다고 들었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곳곳에 곰취, 귀박쥐나물 군락지가 이어진다. 정상 못 미쳐 또 박새 군락지가 나타난다. 지금 한창 하늘을 찌를 듯이 꽃대를 세우고 있다. 능선 북쪽 편 숲에는 고로쇠나무가 심심찮게 보인다. 단풍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여서 그런지 잎사귀가 단풍나무 잎과 흡사하다. 어느 지방에서는 이 나무의 수액을 빼 먹는다는데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그배나무가 한창 하얀 꽃을 피워 나무를 장식하고 있다. 마침 바람이 불어 향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 정상엔 키 작은 조릿대가 잔디 마냥 깔려 있다. 눈앞에 영실 진면목이 펼쳐진다. 동그란 홈 속에 병풍 벽과 오백나한을 아기자기하게 새기고 있다.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이 있듯 여기서 보니 영실(靈室)이 손안에 들어올 듯 아기자기한 조각품으로 보인다. 기념 사진을 찍고 얼른 내려왔다.
: 애월읍과 서귀포시 하원동의 경계를 이루는 볼레오름은 남쪽 주봉이 1,374m이며, 북동쪽 봉우리와의 사이에 평평한 등성마루가 북서향으로 말굽형을 이룬다. 우리는 계속 등허리를 타고 온 셈이다. 섬이 보인다고 해서 나무에 오르니, 이스렁오름 왼쪽 봉우리 너머로 추자군도가 옹기종기 펼쳐있다. 이 오름 남쪽에 존자암터가 있고, 부도를 비롯한 유물이 남아 있다. 발굴이 끝나 복원한다던데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오름 이름도 그와 관계하여 '불교가 전해진 오름'이란 뜻의 불래악(佛來岳)으로 표기되고 있으니, 신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설에 볼래(보리수나무)가 많다고 해서 '볼래오름'이라고 붙였다고는 하나 볼래나무는 가다오다 햇빛이 비치는 곳에 하나둘 보일 정도다. 오창명 박사도『탐라지』나 『 탐라지도』,『제주삼읍전도』같은 곳에 두 봉우리를 '볼레오름' 계열의 '포애악(浦涯嶽)', '볼라악(乶羅岳)', '보라악(甫羅岳)'과 '존자악(尊子菴)' 계열의 '존자악(尊子岳)', '존자(尊子)', '존자암(尊子菴)' 두 종류로 보고 있으나 볼래나무가 많아서 붙였다는 데는 회의적이다.
△ '이스렁' 너의 이름의 정체는…
: 미역취가 서서히 꽃대를 올리며 꽃 피울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내려오다 그늘에서 간단한 요기를 했다. 시간도 이르고 아무래도 이스렁으로 가야만 될 것 같다. 주변에서 백작약 한 뿌리를 발견했다. 남쪽으로 길을 뚫고 서서히 발걸음을 이스렁오름으로 움직인다. 돌멩이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 위를 조릿대가 덮여 있어 잘못 디뎠다가는 낭패 보기 쉽겠다.
: 늪지처럼 물이 흐르고 무슨 시설을 할 요량인지 붉은 페인트가 찍혔다. 이곳은 그냥 놔둬야 하는데…. 곳곳에 흰구슬붕이가 별처럼 박혔다. 재작년 늦가을의 산행에는 잘 익은 산딸나무 열매와 노가리의 성찬이 있었던 곳이다. 그 가을에 따먹었던 다래나무를 확인해보니, 금년에도 제법 꽃망울을 매달고 있다. 그 옆에 섬오갈피 한 그루 발견한다. 요즘은 산삼에다 비견(比肩)한다던데….
: 벌판을 지나 이스렁오름 남쪽으로 오르니, 바로 시로미 밭이다. 오돌또기에도 나오는 이 까만 열매는 불로초로도 소문이 나있다. 먼데서 우리를 그렇게 유혹했던 철쭉은 한물 간 것 같다. 멀리서 보기엔 한창인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 말라버린 것이 있는가 하면 한창인 것도 있고 피어나는 것도 있어 가지각색이다. 볼래오름이 환히 내다보이는 정상 서쪽 허리에 앉아 구름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철쭉을 바라본다.
: 해발 1,335m의 이스렁오름은『제주삼읍총지도』나 『제주삼읍전도』에는 '이사랑악(伊士郞岳)'과 '이사량악(伊士良岳)' 또는 '이사랑오롬'으로 표기되어 있어, 그 뜻은 불분명하나 어슬렁오름으로 표기된 것은 와전(訛傳)된 듯이 보인다. 돌아오는 길은 너무 멀 것 같아서 이스렁오름과 알오름과 사이 물길을 따라 건너기로 하고 젊은 두 사람을 앞장 세웠다. 이것이 보기 좋게 성공하여 한 3∼40십분 앞당길 수 있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나를 괴롭힌 것은 '이스렁'이라는 이름의 정체였다.
※지난주는 제주시 남부권을 답사했기 때문에, 대신 1999년 5월 30일(일요일)에 있었던 산행기를 싣습니다. 양해바랍니다. 그리고, 한 마디씩 남겨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사진은 큰앵초와 삼형제봉에서 본 이슬렁오름입니다.(사이버 '오름 탐색'에서)


: 몇 년째 오름을 다니다 보니, 나도 퍽 이기적(利己的)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처음에는 데려가 주기만 해도 감지덕지하여 어딜 가든 신이 나고 재미있었는데, 이제는 될 수 있으면 가고 싶은 곳이나 안 갔던 곳을 선호(選好)하게 되었으니, 사람의 마음이란 게 자기 중심이고 간사하달 수밖에. 그리고, 오름 오르는 자세도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맑은 공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사람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 나누는 재미도 좋고, 새로운 곳을 찾는 맛도 그만이었지만, 지금 와서는 한 주만 걸러도 궁금하고 몸이 개운치 않다. 골프 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럴 건가?
: 그래서 '남은 돈을 많이 들이면서 골프도 치는데, 내가 신경 조금 쓰면 가고 싶은 오름 못 오르랴.' 하는 심정으로 될 수 있으면 토요일에 볼 일을 다 보아두고 기어이 오름엘 올라야 직성이 풀린다. 사실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 골프장은 잔디가 곱고 푹신푹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빛 좋은 개살구다. 기온이 조금 올라가면 땅속에 잠적해 있던 비료 성분과 살충제 그리고 제초제가 뒤엉켜 올라와 모르는 사이에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이 뻔하다. 그러나, 오름은 그렇지가 않다. 평탄하지도 못하고 더러 거칠거나 풀이 안 난 곳도 있지만, 맨땅은 맨땅대로 돌길은 돌길대로 걷는 맛을 더해주고 운동량을 늘려 준다. 거기다 새롭게 바뀌는 풍경을 즐기면서 삼림욕의 효과까지 거둘 수 있으니….
: 부질없는 생각에 젖어 있는데, 1100 도로 휴게소에 차가 멎는다. 얼른 복장을 갖추고는 출발이다. 한 모퉁이 접어들자마자 곰취 군락지가 나타난다. 국화과에 속하는 곰취는 원래 습한 곳을 좋아하는 봄나물로 향기가 그만이다. 그만이기보다 향기가 짙다 못해 독한 편이다. 얼마 전에 방송에 강원도 산동네 사람들이 이 곰취 뿌리를 캐다가 비닐 하우스에서 순을 키운 뒤, 화분에 심어 관광 상품으로 출하하는 것을 보았다.
▲ 재작년 이곳에서 열렸던 산 열매 축제
: 재작년 10월 둘째 주에는 이 길을 통해 이스렁오름을 올랐다. 그 날의 산행은 온통 열매 따먹었던 기억뿐이다. 정금, 산딸(틀), 주목(노가리) 열매, 으름, 다래 등 이르는 곳마다 달려 있어 가는 길을 더디게 했다. 앞으로 그렇게 먹거리가 풍성한 산행이 두 번 다시 있을 것인가. 나무에 열매가 없어서인지 같은 길인데도 딴 길처럼 보인다.
: 오늘은 대신 분홍색 병꽃이 더러 초록색 잎사귀 속에서 수줍게 웃고 있다. 인동과에 속하는 병꽃은 처음은 주황색이지만 점차로 붉어진다. 인동꽃이 처음에 하얗다가 점차로 노래지는 것과 같은 성질이다. 사람이 많이 안 다녀서 그런지 갈대가 유난히 우거지고 물이 골을 파 놓아 여기저기 함정이 도사려 있다. 울퉁불퉁한 바위도 조릿대 속에 매복해서 무릎과 발목을 노린다. 회원 중 한 사람이 지지난 주 선작지왓에서 다리를 다쳤던 기억을 상기시키면서 조심 운행을 당부해 본다.
: 잠시 조릿대가 없는 자리에 옥잠란 몇 포기가 소담스럽게 꽃대를 밀어 올려 아직은 좁쌀만큼 하지만 꽃봉오리를 준비하고 있다. 짚신벌레라 불리는 매미나방 유충이 참나무나 사오기 등속의 나뭇잎을 갉아먹다 자벌레처럼 줄에 매달려 사람을 귀찮게 한다. 광훈 씨가 종아리에 조인트를 그것도 한 대가 아니라 같은 곳에 두 번 깨였다고 엄살이다. 옷을 걷어 보니 상처가 아프기도 하겠다.
△ 오늘의 주제 꽃은 '큰앵초'로 정해야 하나
: 조그만 냇가에 이르러 잠시 쉬기로 했다. 멀리서 짙은 분홍색 꽃무더기가 손짓을 한다. 큰앵초였다. 선작지왓에서의 주제 꽃은 설앵초였는데, 보름이 지난 지금 설앵초는 다 지고 아무래도 오늘의 주제 꽃은 큰앵초로 정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오름엘 다니다 보면 어느 오름이든 당시 그 오름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 멋대로 그 날의 주제 꽃을 지정(?) 공포(公布)해 왔는데, 오늘은 딱이 이것이다 싶은 것이 없어 망서려 진다. 그만큼 볼레오름의 오지랖이 넓은 까닭이리라.
: 키 큰 나무 비탈을 걷노라니 조릿대가 잠시 사라지고 부엽토가 나온다. 은대난초가 꾸부정하니 큰 키를 세우고 꽃망울을 머금고 있다. 옆에 처음 보는 맛버섯이 있어 부회장님께 귀뜸을 하니 삼각대를 세우고 찍느라 부산하다. 머리가 방울방울 앙증맞게 모여 있다. 카메라 렌즈 속을 들여다 본 회원들이 신기하다고 야단들이다. 그렇게 노출 상태나 조리개의 조절에 따라 렌즈 속은 요지경이 되고, 거기서 예술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 봄의 전령사인 박새도 어느덧 고개를 들고 어줍잖게 꽃망울을 머금었다. 귀박쥐나물잎이 진짜 박쥐처럼 인상적이다. 서어나무 노거수(老巨樹)에 올라 자연의 질서를 배운다. 그만 하면 몇 백년을 살았을 나무의 다섯 가지 중 하나가 고목이 되어 벌 구멍인지 좀 구멍인지 숭숭 뚫려 있고, 위로 솟은 가지엔 바위 수국이 칭칭 감겼다. 그 다섯 가지의 중심부엔 단풍나무가 나서 열 살은 되었을 성싶다.
: 나무 아래쪽에서는 개족도리와 노루귀를 구분하느라 야단들이다. 이 둘은 얼추 보면 얼룩무늬와 색이 비슷하게 생겼지만, 한 줄기에 잎사귀가 하나만 나 있는 것은 개족도리고, 클로우버처럼 한 줄기에 세 잎이 달린 것이 노루귀다. 옆에 세바람꽃이 앙증맞게 피어 있다. 진짜 바람에 꺼질 것 같다.
▲영실(靈室)의 진면목이 여기서야 다 보인다
: 나무 사이로 이스렁오름의 육중한 모습이 나타났다. 언제 어느 쪽에서 보아도 안정된 모습이다. 정상에 철쭉이 무리 지어 손짓한다. 당장 광훈 씨가 저기 가자고 욕심낸다. 내가 가을로 연기하자고 달래보았지만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다. 숲을 벗어나 트인 곳에 서니 더 찬란한 모습으로 유혹한다. 영실 벌판도 온통 철쭉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 섬매발톱나무가 잎사귀 사이로 노랗게 꽃망울을 피워 올리고 있다. 매자나무과에 속하는 매발톱나무의 변종으로 제주도에만 자란다고 들었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곳곳에 곰취, 귀박쥐나물 군락지가 이어진다. 정상 못 미쳐 또 박새 군락지가 나타난다. 지금 한창 하늘을 찌를 듯이 꽃대를 세우고 있다. 능선 북쪽 편 숲에는 고로쇠나무가 심심찮게 보인다. 단풍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여서 그런지 잎사귀가 단풍나무 잎과 흡사하다. 어느 지방에서는 이 나무의 수액을 빼 먹는다는데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그배나무가 한창 하얀 꽃을 피워 나무를 장식하고 있다. 마침 바람이 불어 향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 정상엔 키 작은 조릿대가 잔디 마냥 깔려 있다. 눈앞에 영실 진면목이 펼쳐진다. 동그란 홈 속에 병풍 벽과 오백나한을 아기자기하게 새기고 있다.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이 있듯 여기서 보니 영실(靈室)이 손안에 들어올 듯 아기자기한 조각품으로 보인다. 기념 사진을 찍고 얼른 내려왔다.
: 애월읍과 서귀포시 하원동의 경계를 이루는 볼레오름은 남쪽 주봉이 1,374m이며, 북동쪽 봉우리와의 사이에 평평한 등성마루가 북서향으로 말굽형을 이룬다. 우리는 계속 등허리를 타고 온 셈이다. 섬이 보인다고 해서 나무에 오르니, 이스렁오름 왼쪽 봉우리 너머로 추자군도가 옹기종기 펼쳐있다. 이 오름 남쪽에 존자암터가 있고, 부도를 비롯한 유물이 남아 있다. 발굴이 끝나 복원한다던데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오름 이름도 그와 관계하여 '불교가 전해진 오름'이란 뜻의 불래악(佛來岳)으로 표기되고 있으니, 신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일설에 볼래(보리수나무)가 많다고 해서 '볼래오름'이라고 붙였다고는 하나 볼래나무는 가다오다 햇빛이 비치는 곳에 하나둘 보일 정도다. 오창명 박사도『탐라지』나 『 탐라지도』,『제주삼읍전도』같은 곳에 두 봉우리를 '볼레오름' 계열의 '포애악(浦涯嶽)', '볼라악(乶羅岳)', '보라악(甫羅岳)'과 '존자악(尊子菴)' 계열의 '존자악(尊子岳)', '존자(尊子)', '존자암(尊子菴)' 두 종류로 보고 있으나 볼래나무가 많아서 붙였다는 데는 회의적이다.
△ '이스렁' 너의 이름의 정체는…
: 미역취가 서서히 꽃대를 올리며 꽃 피울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내려오다 그늘에서 간단한 요기를 했다. 시간도 이르고 아무래도 이스렁으로 가야만 될 것 같다. 주변에서 백작약 한 뿌리를 발견했다. 남쪽으로 길을 뚫고 서서히 발걸음을 이스렁오름으로 움직인다. 돌멩이들이 우뚝우뚝 서 있는 것이 이채롭다. 그 위를 조릿대가 덮여 있어 잘못 디뎠다가는 낭패 보기 쉽겠다.
: 늪지처럼 물이 흐르고 무슨 시설을 할 요량인지 붉은 페인트가 찍혔다. 이곳은 그냥 놔둬야 하는데…. 곳곳에 흰구슬붕이가 별처럼 박혔다. 재작년 늦가을의 산행에는 잘 익은 산딸나무 열매와 노가리의 성찬이 있었던 곳이다. 그 가을에 따먹었던 다래나무를 확인해보니, 금년에도 제법 꽃망울을 매달고 있다. 그 옆에 섬오갈피 한 그루 발견한다. 요즘은 산삼에다 비견(比肩)한다던데….
: 벌판을 지나 이스렁오름 남쪽으로 오르니, 바로 시로미 밭이다. 오돌또기에도 나오는 이 까만 열매는 불로초로도 소문이 나있다. 먼데서 우리를 그렇게 유혹했던 철쭉은 한물 간 것 같다. 멀리서 보기엔 한창인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다 말라버린 것이 있는가 하면 한창인 것도 있고 피어나는 것도 있어 가지각색이다. 볼래오름이 환히 내다보이는 정상 서쪽 허리에 앉아 구름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철쭉을 바라본다.
: 해발 1,335m의 이스렁오름은『제주삼읍총지도』나 『제주삼읍전도』에는 '이사랑악(伊士郞岳)'과 '이사량악(伊士良岳)' 또는 '이사랑오롬'으로 표기되어 있어, 그 뜻은 불분명하나 어슬렁오름으로 표기된 것은 와전(訛傳)된 듯이 보인다. 돌아오는 길은 너무 멀 것 같아서 이스렁오름과 알오름과 사이 물길을 따라 건너기로 하고 젊은 두 사람을 앞장 세웠다. 이것이 보기 좋게 성공하여 한 3∼40십분 앞당길 수 있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나를 괴롭힌 것은 '이스렁'이라는 이름의 정체였다.
※지난주는 제주시 남부권을 답사했기 때문에, 대신 1999년 5월 30일(일요일)에 있었던 산행기를 싣습니다. 양해바랍니다. 그리고, 한 마디씩 남겨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사진은 큰앵초와 삼형제봉에서 본 이슬렁오름입니다.(사이버 '오름 탐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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